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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나: 좋은 과학자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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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비평적 글쓰기 수업의 수강생은 모두 학교에서 여는 ‘한글날 기념 과학 글쓰기 대회’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시나 소설을 쓸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고 상도 받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10년 전의 내가 기특하기도 하고 글도 재밌어서 올려둔다.

좋은 과학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좋은 과학자가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초등학생 때 KAIST 드라마를 보고 나서 ‘KAIST에 입학하여 좋은 과학자가 되어…’로 바뀌었고, 중학생 때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나서는 ‘KAIST에 입학하여 훌륭한 이론물리학자가 되어…’로 바뀌었다. 내 미래는 단순했다. “과학 경시 공부-과학고등학교 입학-KAIST 입학-훌륭한 이론물리학자(좋은 과학자)-노벨상 수상”. 왜 과학자가 되고 싶은지, ‘좋은’ 과학자나 ‘훌륭한’ 이론물리학자가 어떻게 될 것인지, 왜 노벨상을 타고 싶은지, 타고 나서는 무얼 하고 싶은지… 같은 고민은, 한 적 없었다. 물론 KAIST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중학생 때의 난, 그저 내 꿈의 첫 구절인 ‘KAIST 입학’을 향해 부모님이 깔아준 레일 위에서 바쁘게 달리고만 있었다.

부모님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공부만 팠던 나는 2003년 3월 한국과학영재학교 1기로 입학했다. 신입생들이 강당에 모여 앞으로의 자기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난 ‘KAIST에 가서 훌륭한 이론물리학자가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겠다는 꿈을 당당히 말했다. 그러나 나의 당당함은 단 1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물리학 이론이 복잡한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된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직면할 수많은 천재들과의 경쟁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난 좋은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되고 싶은지, 어떻게 될 건지, 되고 나면 뭘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멍하니 뛰다가 조그만 돌 몇 개에 넘어져서는, 그대로 주저앉아 날 넘어지게 만든 세상에서 도망쳤다. 게임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도박도 했지만, 현실도피에는 판타지 소설이 최고였다. 당연히 성적은 바닥이었다. 부모님은 놀라고, 혼내고, 격려하셨지만, 시험쳤을 때와 성적표 나왔을 때 잠깐 후회할 뿐, 계속해서 놀았다. 그토록 당당히 말했던 노벨상 수상이라는 꿈은 이제 서울 하늘의 별 마냥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다.

과학영재학교 1기라는 타이틀 덕분이었을까. 2006년 3월, 나는 어떻게든 KAIST에 입학할 수 있었다.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면서도 끝없이 놀고만 있는 스스로를 보며 거의 사라졌던 자신감과 자존감도 조금 되살아났다. ‘이젠 열심히 공부해야지. 전공은 어떡할까? 난 미적분이 정말 싫은데. 고등학교 때 C++ 프로그래밍이 재미있었지. 이걸로 할까? 컴퓨터공학은 미적분을 별로 쓰지 않겠지?’ 정도가 새내기 때 내 생각이었다. 이때의 내겐 꿈이 없었다. 훌륭한 이론물리학자라는 꿈은 미분방정식에게 깨졌고, 노벨상 최초 수상이라는 꿈은 자신감과 자존감이 사라지며 함께 스러졌다. 남은 건 막연하게나마 ‘좋은 과학자’가 되겠다는 것 정도. 당연히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판타지소설의 말초적 자극에 심하게 빠져있었다. 고등학교 때와 똑같이 후회와 다짐 사이에서 노는 모습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KATUSA 지원을 권유하셨고, 몇 달 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합격했음을 알았다. 경쟁률이 6:1이 넘는 상황에서 얻은 행운이었지만 당시의 내겐 별로 상관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술, 담배, 자살까지 생각하던 때였으니 군대 따위가 대수였겠는가.

2007년 7월,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한 채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순간이었다. 육체적으로는 구속당했지만, 내 정신을 옭아매던 판타지 소설의 공상세계에서는 풀려났다. 바깥세상과 완벽히 단절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내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왜 이룰 것인가? 난 KATUSA로서 개인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고,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글쓰기를 열과 성을 다해가며 공부했다. 2년간 메모장 두 개 반과 노트 세 권이 내 글씨로 채워졌다. 자아를 확립하고 인생 목표를 세우기 위한 즐거운 노력이었다. 메모장에 의하면, 난 2008년 8월 즈음부터 나만의 인생 목표를 세우고 다듬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항상 ‘이번만큼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곧잘 바뀌었다. 어쨌든 지금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목표가 무엇이든 그걸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자.

진부했지만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목표를 세우고 나니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난 이 목표를 다듬고자, 아니 스스로 만든 목표에 그저 들떠서, 많은 사람과 만나 내 삶을 말하고 그들의 삶을 들었다. 맨날 재미없게 진지한 얘기만 한다고, 네가 무슨 철학자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화라는 게 참 즐겁다는 것과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다는 것을 이 때 알았다. 목표라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 때 알았다.

제대 후, 2009년 9월에 복학하자마자 전산학과로 등록했다. 왜 전산학이었나? 새내기 때처럼 ‘미적분이 싫어서’가 아니라, 전산학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과 달리 전산학은 ‘인간이 만든’ 컴퓨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니, 노력만 하면 내가 궁금해 하는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풀리리라 믿어서였다. 실은 좋은 세상만 만들 수 있다면 전공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냥 내가 재미있었던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이 더 컸다. 실제로 공부해 보니 모든 문제가 명쾌히 풀리리란 믿음은 바로 깨졌지만, 전산학은 재미있는 학문이었다. 게다가 이 공부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도 되어줄 것 같아 기뻤다. 보아하니 세상은 바야흐로 웹 2.0,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 인터넷에서 좋은 정보를 잘 얻어내 잘 활용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관찰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고를 거쳤다.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에 접근하여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느냐의 여부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아프리카나 남미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인터넷 최강국이라는 우리나라조차 수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쓸 수 없는 환경에 있다. 왜? 컴퓨터가 비싸니까. 그러면 컴퓨터의 가격은 어떻게 낮출까? 똑같은 부품과 똑같은 프로그램을, 즉 똑같은 자원을 더 좋은 효율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들면, 같은 가격에 더 좋은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난 컴퓨터의 자원 관리와 효율 증대를 주제로 연구하여, 좋은 컴퓨터가 싸게 공급되도록 해야겠다.

나는 ‘컴퓨터의 자원 관리와 효율 증대를 연구하여’ ‘좋은 컴퓨터가 싸게 공급되도록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인터넷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면’ ‘그 사람들의 삶의 질이 크게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고, 이것이 내가 생각한 ‘좋은 세상 만들기’의 수단이었다. 고백하자면 이 때 즈음 난 상당히 우쭐한 상태였다. 그럴듯한 인생 목표도 세웠고, 구멍났던 학점도 많이 채웠고, 부모님의 신뢰도 회복했고. 난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2011년 6월, 우연한 호기심으로 농활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충남 보령에서의 8박 9일. 농사일은커녕 시골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던 내게 이 짧은 시간은 큰 충격이었다. 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주제에, 정작 우리나라에서 소득이 아주 낮은 집단에 속하는 농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책으로, 인터넷으로, 머리로 알았던 농민의 삶이 실제 삶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몇 년간 머리로 얻은 지식을 8시간 동안 포도밭에서 순을 따면서 체화하며, 헛똑똑이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웠을 따름이다. 하루 8~10 시간의 노동, 중간 중간의 꿀 같은 새참, 마을 어르신들께 미숫가루 배달, 어머니들께 안마와 팩 해드리기, 농민집회 참여, 마을 신문 만들기, 마을 잔치에서 다 같이 춤추기. 농민의 삶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인생 목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난 좋은 컴퓨터를 제공하면 당연히 삶의 질이 높아지리라 생각했다. ‘좋은 컴퓨터를 싸게 공급하여 컴퓨터/인터넷 접근성을 높이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에서 ‘공급하여’와 ‘컴퓨터/인터넷 접근성’ 사이의 연결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농촌에도 컴퓨터는 있었다. 6~70대의 나이에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하고 쓰러져 자는 농민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시간도 이유도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컴퓨터를 잘 쓰려고 뭔가를 배울 필요도 없다. 웹이니 소셜이니 하는 것들은 먼 나라 이야기다. 아무리 싸고 좋은 컴퓨터를 만들더라도 사람들이 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컴퓨터를 하나의 ‘기술’로 볼 때, 사람들이 쓰지 않고 쓸 수 없는 기술은 ‘좋은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요즈음 ‘어떤 과학자가 좋은 과학자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고, 대단한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좋은 과학자인가? 그러면 사람들이 그 기술을 쓰지 않거나 쓸 줄 몰라서, 극히 소수만이 그 기술로 큰 혜택을 얻는다면 어떨까. 그는 좋은 과학자일까? 몇몇 부패한 정치인들만 잘 써서 돈을 많이 벌게 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하면 아무도 그를 좋은 과학자라고 말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의 혜택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과학자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기술 혜택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실천 방법은 많다. 싸고 좋은 컴퓨터를 공급하여 기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도 있고, 쉽게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을 고안할 수도 있으며, 새로 나온 혁신적인 기술에 대해 지속적으로 홍보할 수도 있다. 기술을 잘 사용하는 법을 가르칠 수도 있다. 좋은 과학자가 어떤 과학자인지 많은 사람들과 토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나를, 좋은 과학자가 된 나를 상상할 때면 아주 기분이 좋다.

어릴 적, ‘좋은 과학자’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내가 아닌 부모님이 대신 꾸었던 것이었다. 부모님의 우산에서 벗어나, 몰아치는 태풍을 원망하며 목표 없이 쓰러져 허우적대다가 그 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홀로 서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내 길을 나아가다 보니, 분명 모양새는 크게 다른데 이 길이 내가 꿈꾸었던 그 길로 보인다. 오랜 방황 속에서 버려졌다고 느꼈던 꿈이 깊은 성찰과 고민 끝에 다시 되돌아온 걸 보면 삶이란 참 오묘하고 즐겁다. 앞으로도 삶의 목표는 조금씩 변할 테지만 좋은 과학자가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꿈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과학자가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술 혜택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30년 뒤에는, 청년이 된 아들딸에게 “아빠같이 좋은 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단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것이 2011년 9월의 내 인생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