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 작성: 2021.09.13 / 최종 업데이트: 2021.10.15
얼마 전 가족여행 중, 아내가 (자산 측면에서) "생애설계연표 작성을 해보자"는 얘기를 꺼냈다. 아내가 구독하는 "구채희"라는 유튜버가, '10억 모으기'를 목표로 신혼 때 작성한 연표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나는 '우리 인생에 얼마나 돈이 필요할까를 계획하려면, 먼저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제대로 설계해봐야겠다' 라는 말을 아내에게 했고, 불현듯 10년 전이 떠올랐다.
10년 전에 그린 30년 계획
10여년 전 몸담고 있었던 대학교 창업동아리 KLC에서는 '미래공유'라는 이름의 인생 30년 계획 템플릿을 채우고, 발표하고, 피드백하는 걸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이 템플릿으로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도 본인 계획을 세워봤고, 그렇게 우리의 미래 얘기를 함께 주고받으며 서로간의 믿음도 더 키웠다.
- 내 인생의 비전을 정의한다.
- 그를 토대로 30년 뒤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적어본다.
- 30년 목표에 가까워지려면 15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적어보고, 다시 그를 토대로 10년 뒤를 적어보고, 3~5년 뒤, 그리고 1년 뒤까지 적어본다.
- 마지막으로 내가 앞으로 한두달동안 어떤 노력을 해야 '1년 뒤의 나'에 가까워질지 적어본다.
-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이동하면서 디테일을 더 채워본다. '이 때'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 때'의 나와 연결될 수 있을지.
지금 봐도 탑다운과 바텀업을 조합한, 참 괜찮은 템플릿이다. 재밌게도 현재 한국신용데이터(이하 KCD)의 프론트엔드 팀원들에게 개인 분기 목표를 세우도록 하고, 그 목표에 아주 조금씩이나마 다가가고 있는지 매주 체크인에서 확인하는 과정이 이 미래공유와 살짝 유사해 보인다. 인지하고 이렇게 설계한 건 아니니 우연과 무의식이 조금씩 도와준 것 같다.
아무튼 이 때부터 내 인생 목표는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음을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였다. 어찌보면 거창하고, 어찌보면 소소했지만 이런 모습의 나를 상상할 때 행복감을 느꼈다.
10년간의 나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 다니다가 자퇴 후 창업하고, 친구들과 게임도 만들어보고, 6년간 스타트업 3개를 거치며 꽤 열심히 살았다. 만 34세가 되었고, 귀여운 딸의 아빠가 되었다. (대출은 많지만) 집도 있고 차도 있다. 괜찮은 회사에서 연봉 많이 받고 인정받으며 직장생활 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이걸로 충분한가?
지난 10년간,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좀 비틀거리고 변하기도 했어도 큰 줄기는 항상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음을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에 맞닿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개 현재에 충실했을 뿐, 인생 목표를 이루고 그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구체적, 의식적인 노력은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계기는 여행 중 아내의 한마디였지만, 어쨌든 34세 생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인생 설계를 하면서 움직일 때가 온 것 같다.
다시 세우는 인생 계획: 20년 뒤 나는?
2012년에 세웠던 계획처럼, 내가 만 55세가 되는 2042년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나는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뭘 하며 살고 싶은가? 현재의 나는 글 읽고 쓰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 돕는 것도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는, 나의 활동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음을 명시적으로 피드백받으면 보람차고 행복해진다. 10년 전의 나도 그랬으니 20년 뒤의 나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동안 바뀐 건, 건강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다.
만 55세의 나는:
- 현업에서는 은퇴한다. 주로 하는 일은 글 쓰고 사람 만나서 대화하는 것.
- 자녀가 커가는 걸 지켜보고, 최대한 경청하며 꿈을 지원한다.
- 자서전을 열심히 쓰고 있다.
- 나 또는 내 주변 사람들이 실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함께 논의하거나, 때론 직접 코딩한다.
- 괜찮아 보이는 스타트업이 더 잘 성장할 수 있게 코칭해준다.
- 돈은 상당히 많다. 구체적으로는,
- 시간을 절약해 나와 가족들이 더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다면 돈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수준. 안드로이드 가사도우미를 고용해 집안일하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인다거나, 5레벨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서 장소 이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거나.
- 신체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수준. 매일 집에서 요가/필라테스를 배운다거나, 마사지를 받는다거나.
-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취미활동에 돈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수준. 보드게임, 즉흥연기, 피아노 등.
- 괜찮아 보이는 스타트업에 개인적으로 엔젤투자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수준. 특히 유아~초등교육 분야.
즉 55세에 은퇴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도, 인생 목표인 "세상에 유의미한 임팩트 남기기"는 지속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삶이다. 적다 보니 '55세에 이렇게 살고 있다'기 보다는 '55세부터는 이렇게 살고 싶다'에 가깝군.
20년 뒤의 내가 되려면, 앞으로 5~10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앞서 세운 계획에는 굉장히 큰 구멍이 있다. 근시일 내에 세상을 크게 바꿀 만한 기술과 변수들을 딱히 고려하지 않은(못한) 채 상상한 미래기 때문이다. 이런 변수를 대강만 나열해봐도 이정도는 된다.
-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변화
- 한국의 끝없이 낮아지는 출산율, 급변하는 인구 구조
- AI와 로봇으로 대체될 수많은 직업들
- 자율주행 차량이 바꿀 물류 시장
- VR과 AR이 바꿀 게임과 쇼핑 시장
- 블록체인 기술이 바꿀 금융 시장
- 인터넷을 대체할 메타버스
문제는, 이렇게 내멋대로 늘어놓은 변수들 중 내가 제대로 안다고 할 만한 분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이야 짧은 백엔드 개발 경험과 웹개발 경험, 프로덕 엔지니어로서 이 회사에서 쌓아올린 신뢰를 조합하여 프론트엔드 팀 리드 하면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지만, 이러한 변수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로 5년이 지났다면 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답은 부정적이다.
- 내가 지난 몇 년간 백엔드나 인프라 쪽으로 계속 팠다면 이런 고민을 덜 했을 수도 있다. 이쪽은 AI가 세상을 다 바꿔버리더라도, 여전히 사람이 유의미한 가치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아키텍처 설계라든가). 그런데 프론트엔드 기술은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다.
- → 2021.10.15 업데이트: 이것 또한 오만한 생각이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웹 기술보다는 "프로덕" 엔지니어링에 더 집중했고 이쪽으로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런데 "웹 프론트엔드 기술만으로 살아남기에 부족하다"고 하기에는 이쪽도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재밌게 파고들 것도 너무 많다는 걸 최근 시야를 넓혀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리다 보니 새삼 깨달았다.
- 물론 아예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전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그리 길진 않았지만 팀 리드로서 하는 일들이 제법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고, 보람도 있다. 그러나 기술역량이 부족한 엔지니어링 매니저에게 경쟁력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나는 핸즈온 코딩이 아직 무척 고프다.
그리고 20년 뒤 계획에서 '상당히 많은 돈'이라는 측면을 보면, 내가 20년 뒤에 은퇴해서 누리고 싶은 삶을 위해서는 단순히 근로소득 모으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특히 스타트업에 개인 투자를 할 수준이려면). 꽤 큰 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은 최소 한 번쯤은 비교적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IPO 또는 그에 준하는 엑싯까지 함께 하는 정도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볼 때, 앞으로 5년 정도는 진지하게 '미래를 바꾸고 있는 기술'을 익히고, 그러한 기술과 더불어 지금 가지고 있는 스킬과 매니징 역량 따위를 발휘하여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몇 년간 함께 성장시킨다.... 가 비교적 이상적인 플로우로 보인다.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지, 얼마나 건방진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내가 그나마 가장 접근하기 쉽고, 가장 현실화된, 또한 다른 혁신들의 밑바탕이 될 기술은 AI라고 본다.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내게 주어진 이직 기회는 많아야 두 번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다음 커리어는 대략 이런 조건들을 만족하는 곳이면 좋겠다.
- 머신을 학습시키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직접 가지고 있거나, 가져올 수단이 있다.
- AI 기반 프로덕을 주력으로 내세우고 있어서, 프로덕 개발에 참여하기만 해도 이쪽 생태계의 트렌드를 알 수 있으며, 이 도메인 기술을 전혀 모르는 나 같은 개발자에게라도 AI 학습과 역량 향상의 기회가 열려있다.
- 사실 "AI"는 고정은 아니고 기후변화, 로봇, 자율주행, VR, 블록체인 등 미래를 격변시킬 도메인에 관련된 기술이라면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서로서로 어느정도 엮여있을 것 같기도 하고.
- 나의 현재 스킬셋(웹 프론트엔드 프로덕 엔지니어링, 엔지니어 코칭/매니징)을 이 회사가 필요로 한다. 적어도 내 높아진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주고, 그에 대한 반응을 내가 직접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프로덕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프로덕의 성장 포텐셜이 커서, 내 기여분도 꽤 클 수 있는 시장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회사가 어떤 곳이 있을지는 이제부터 조금씩 찾아봐야 할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떠오르긴 하는데 이런 데는 이미 머신러닝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뽑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거의 인맥 따라 비교적 편하게 입사한지라 면접 준비도 거의 해본 적이 없고.
단, '미래를 바꾸고 있는 기술'을 아주 심도있게 파고들어서, (예를 들어) AI 엔지니어로 전직하는 걸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주요한 무기는 여전히 웹 프론트엔드 엔지니어링과 팀 매니징/코칭에 있다고 본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고, 내 핵심역량이 더 많은 곳에서 더 잘 활용될 수 있게 하는, 그래서 내가 세상에 더 큰 임팩트를 줄 수 있게 돕는 도구로서 이러한 기술을 익히고 싶다. (회사 경험이 아닌, 개인 프로젝트나 MOOC 따위를 이용하여 AI를 배우는 것으로 이러한 수준의 시야와 경험을 얻을 수 있을까? 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재미도 없고 유의미한 효율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아서..)
이렇게 다음 커리어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여 당장 지금 회사를 떠날 생각은 없다. '초기 단계 스타트업 들어가서 엑싯까지' 하려면 팀 빌딩과 매니징이 필수 역량인데, KCD에서 중간 규모(6-7명)의 팀 매니징을 경험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론트엔드 팀 리드를 맡은 작년 말부터의 내 성장폭은 (프론트엔드 기술 측면과 매니징 측면 양쪽에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상당히 가팔랐다. 직접 코딩을 많이 못한다 뿐이지, 팀원들의 좌충우돌을 간접적으로 흡수하면서도 많이 배우고 있고, 또 개발 문화를 만드는 쪽에서도 여러가지 유의미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조바심을 버리고, 이러한 시도와 배움들을 충분히 내 것으로 만들며 내실을 다지면서 움직여볼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 KCD에서는 이런 시도들을 좀 더 해보려 한다. 프론트엔드 팀 개인 목표 설정에 사용하는 Engineering Ladders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았다.
- Evangelizes ~ Masters Level for Technology(knowledge of the tech stack and tools)
- 캐시노트 2.0 리뉴얼 작업을 주도하면서 지금까지의 safe zone에서 벗어나 급격한 기술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게 나의 새로운 safe zone이 되었고, 그 안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대부분 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마스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zone이 여전히 좁은 편이라 이걸 더 넓히는 경험은 필요하다.
- create-react-app → nextjs, gatsby, ...
- CSR → SSR
- webpack을 비롯한 빌드/컴파일/트랜스파일 도구에 대한 더 깊은 이해
- 클라이언트 mocking을 벗어난 수준의 E2E 테스팅
- 프론트엔드에서의 인프라(AWS, 테라폼 등)를 다루는 쪽으로는 초보 수준에 가까워서 팀원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환경을 만드려면 이런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이쪽 기술은 내가 직접 능숙하게 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떤 작업이 필요한지 이해하고, 전문성을 가진 팀원을 백업하는 수준으로는 익히고 싶다.
- Owns ~ Evolves Level for System(level of ownership of the system(s))
- 현재 내가(프론트엔드 팀이) 가장 취약한, 따라서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이다.
- KCD의 각 프로덕이 프론트엔드 측면에서 어느정도 수준의 SLA를 가져야 하는지 정의하고, 모니터링하고, 개선해야 한다. 아직은 팀 안에서 CI/CD의 정의도 제대로 내린 바가 없고 파이프라인도 "제대로"는 구축했다고 보기 어렵다. 발전을 위해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 Manages Level for People(relationship with the team(s))
- 프론트엔드 팀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역량 목표와 기준을 세우고, 훌륭한 팀플레이어로서 높은 생산성과 동기부여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 코칭도 열심히 하고, 생산성 유지/향상을 돕는 (자동화) 도구와 프로세스도 만들거나 제안해야 한다.
- Defines Level for Process(level of engagement with the development process)
- 프론트엔드 팀이 프로덕 엔지니어로서 일하는 방식과 지켜야 할 규율을 정의하고, 이를 잘 준수하여 역량이 향상되도록 돕는다. (참고: 당신이 아무리 공부해도 개발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
- 생산성과 마찬가지로, 규율을 잘 지킬 수 있게 돕는 (자동화) 도구와 프로세스를 만들거나 제안해야 한다.
- Multiple Teams ~ Company Level for Influence(scope of influence of the position)
- 꾸준한 기록과 기술 블로그 발행을 통해 프론트엔드 팀이 일하는 방식이 다른 팀에도 전파되게 한다.
- 팀원들에게도 단순한 엔지니어가 아닌 미니 CTO로서 협업자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전파하도록 계속 독려해야 한다.
맺으며
사실 이렇게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한 그대로 내 삶이 흘러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솔직히 계획을 따르며 사는 삶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는 전혀 알 수 없으므로 계획은 계속 수정되어야 하고, 따라서 계획 그 자체보다는 계획하는 행위에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에 인생 계획을 세워보면서 내 뇌에 로드맵을 박아뒀으니, 앞으로는 다시 현재에 충실하면서 무의식이 활약하길 기대할 것이다.
그래도, 5년 뒤 다시 이 글을 봤을 때는 "그동안 유연하게 살면서도 계획도 어느정도 지켰다" 정도로는 되어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