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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과 특별함을 깨뜨릴 때 성장 기회가 온다

태그
단상
최종 편집
Dec 30, 2022 2:30 AM
발행일
September 19, 2021

IE ≠ 웹브라우저

구글의 크롬 브라우저는 내게 아주 소중한 도구다. 내가 일상적으로 크롬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과거 나에게 커다란 성장의 단초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크롬을 처음 써본 게 아마 2008년이지 싶은데 누나가 파이어폭스라는 웹브라우저를 쓰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IE)보다 훨씬 빠르다며 나한테도 써보라고 권했었다. 나는 왠지 모를 거부감에 파이어폭스는 안 쓰고 있었는데, 파이어폭스보다도 더 빠른 브라우저가 나왔다는 말에 이번엔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크롬이 만 1세 되기도 전부터 크롬을 썼다.
크롬이 만 1세 되기도 전부터 크롬을 썼다.

그게 처음으로 IE가 아닌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IE를 써야만 하는 게 아니고, IE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찾아본다 = IE를 더블클릭해서 열고 네이버로 이동해서 무언가를 찾아본다" 였는데, IE가 내 안에서 지니고 있던 웹브라우저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열려 있던 수많은 선택의 기회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고, 특별하다고 여겼던 것도 사실은 여러 평범한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던 그 순간. 선택이 가능한지조차 몰랐다가 사실은 내게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 내 사고가 한 차원 확장되고 시야가 크게 넓어지는 걸 느꼈다. 좀 과장하자면 2차원 세계에 살다가 일어나서 3차원에서 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개발의 ㄱ도 잘 몰랐고 개발을 업으로 삼게 될지도 몰랐지만, 어쩌면 이 사건이 내가 개발자로서의 첫걸음을 뗀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뒤로도 이 깨달음이 점차 넓게 전이되었고, 수많은 당연함과 특별함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 "검색은 당연히 네이버지" → 네이버는 검색엔진의 한 종류일 뿐.
  • "컴퓨터 = 윈도우즈" → 윈도우즈는 컴퓨터를 구동시키는 OS의 한 종류일 뿐.
  • "터미널에서 ls를 치면 신기하게도 파일 목록이 나오네" → 터미널 명령어는 프로그램의 한 종류일 뿐.
  • "파일 버전을 관리하려면 당연히 파일명에 날짜를 넣어야지" → svn, 그리고 git.
  • "컴퓨터 새로 살려고? 백업은 했어?" → 클라우드 저장소.
  • "웹페이지가 갱신되려면 당연히 새로고침이 되어야지" → ajax에서 깜짝 놀라고, SPA로 신세계를 느낌.
  • "웹사이트 운영하려면 서버 컴퓨터를 사야겠는데..." → AWS.
  • "수업은 당연히 선생님이 준비해야지" → 참여자가 직접 본인이 배우고 싶은 주제를 정하면 만족도가 더 높다(e.g., AC2)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재밌는 점은 대부분은 선택이 가능함을 알기 전까지는 별로 불편한줄도 몰랐는데, 시야가 넓어진 뒤부터는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 이전 상태로 다시 돌아가기 아주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개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여성 참정권이 제한되고, 주 60시간 노동이 당연시되고, 실내에서 거리낌없이 담배피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내게는 무엇이 당연하고, 무엇이 특별할까

당연한 것들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이 대체 가능하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기 어렵다. 특별한 것들은, 동작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또는 이해해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법의 도구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여긴다. 특별함은 그 대상이 특별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함보다는 좀 더 깨뜨리기 쉽다. 그리고 특별함이 깨지기 시작하면 당연했던 것들도 당연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또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받음으로써 당연함을 깨뜨릴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내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AI 기술이다. AI가 세상을 이미 많이 변화시켰고, 앞으로도 변화시킬 것은 알겠는데 그 변화를 내가 이해하거나, 변화에 기여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감정을 깨버릴 수 있게 될 때, 작게나마 또 시야가 확장되리라.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현재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무언가도 깨뜨릴 수 있는, 그래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