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돌 지난 딸아이를 키우시는, 최근 돌치레로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하시며 너무 힘들어하시던 회사 동료가 슬랙 데일리 스탠드업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서로를 배려하면서 일하는 것을 느꼈음. 특히 (*동료 디자이너) 한테 많이 미안하고 고마움. 개인사로 인해 회사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게 너무 죄송스러웠음.. 육아도 일도 정말 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음.."이라고 남기셨다.
많은 팀원 분들이 위로의 말을 남겨주셨고, 나도 그 마음이 크게 공감되어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다가 가끔 너무 지치고 힘겨워서 주변 도움도 받으며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더군요." 라고 남겼다.
그분이 “이 말 너무 큰 위로인데요ㅋㅋㅋ ㅠㅠㅠ 뭐든 혼자 잘하긴 어렵나보군요..” 라고 해주셨는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주변으로부터 충분히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내 주변을 충분히 도와주고는 있는 걸까? 갑자기 아내가 떠올랐다.
얼마 전 오랜 멘토 김정훈님과 통화하면서, 내가 최근 거의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고 아내에게는 신경을 못 쓰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경성이 낮아서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고, 어떤 경험을 하든 거기서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하여 대부분의 활동에 호불호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아내랑 연애하던 시절에 내가 많은 걸 주도하기보다는, 아내가 하자는 것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가 되었다. 아내도 원래 이런 연애 패턴을 좋아했었는데, 결혼하고 육아하면서부터는 많은 게 바뀌었다. 우리 삶이 아이에 많이 맞춰지면서 둘 모두, 특히 아내의 에너지 레벨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의 약점 하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거울 같은 존재라서, 아내의 기분이 좋아서 이것저것 얘기하고 제안하면 내 기분도 좋아진다. 아내가 축 처지고 기운이 없으면 나도 덩달아 처진다. 아내의 감정 상태에 내가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건데, 문제는 내가 아내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7년동안 연애하면서는 거의 싸운 적이 없을 정도로 행복하게 지냈다. 잠깐씩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아내는 잠깐만 시간 달라고 하며, 혼자서 금방 잘 풀어냈다. 그러다보니 아내 기분을 풀어주는 훈련이 거의 안 됐던 게 아닌가 싶다.
신경성이 낮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눈치가 없고 센서가 약하다는 것이다. 나는 약한 센서를 보완하고자 명시적으로 의도를 물어보고, 컨텍스트를 요구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찬가지로 나는 컨텍스트를 언제나 더하려고 하고, 내 의도를 추측하지 말고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방식이 직장에서는 잘 먹혔지만 집에서는 쉽지 않았다. 아이는 자기가 왜 기분이 안 좋고 왜 울음이 터졌는지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아내는 힘든데 좀 알아서 해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생각을 물어보면, 물어봐주는 건 좋지만 그런 생각을 할 힘조차 없을 때도 있다는 걸 이해해달라고 할 때도 있다. 직장에서는 이런 피드백을 들어보진 못했었지.
오늘 점심 먹으며 이런 얘기를 아내와 나눴다. 당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올려줄지 잘 모르겠다고. 가끔은, 힘없이 쳐져있다가도 친구와 통화하며 깔깔대며 웃는 당신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웃게 해줬던 건 언제였더라? 하며 자괴감이 든 적도 있다고. 물론 내가 모든 걸 잘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 같다고.
아내가 가장 먼저 말한 방법은 ‘본인이 혼자서 집에서 쉴 수 있게 내가 주말에 여은이를 데리고 밖에 오랫동안 나갔다 오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나, 여전히 아내가 혼자 추스리게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은 뭘까. 아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직접 얘기한 적도 없고 가끔은 스스로 원하는지도 몰랐던 것을 내가 딱 해줄 때’ 은은하게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당연히 어려운 거라고도 덧붙였다.
정말로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은이와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아내가 토요일에 일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토요일에 여은이와 시간 보내는 게 일상이 되었다. 토요일에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인근 홈플러스 키즈카페에 오픈런해서, 돈까스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게 주요 패턴 중 하나다. 여은이는 배스킨라빈스의 ‘엄마는 외계인’에 있는 초코볼을 무척 좋아한다. 몇 달 전,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초코볼을 찾아서 여은이에게 줬다. 여은이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아빠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있네?”라고 말했다.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오래된 초코파이의 CM송이고, 언제나 컨텍스트를 요구하는 내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여은이에 대해서는 가능했다.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기억하니까. 내가 아내에 대해 그러지 못했던 건 결국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은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덧 1. 이런 생각이 가능했던 건 매일 일기쓰고 주간회고 하면서, 그리고 다른 분과의 대화를 통해 메타인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리라. 좋은 장치를 마련해두어서 다행이다.
덧 2. AC2에서는 (신경성과 상관없이) 마음읽기 능력을 훈련해서 향상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들었다. 이것 또한 점차 내 관심의 원 안으로 들여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