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은 언제나 '글'이었다. 10여년 전부터는 bullet point를 이용하는 개조식 글쓰기만 주구장창 해왔고, 이런 구조화된 글쓰기가 내 성향에도 맞았다. 기록 잘 한다, 정리 잘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요 몇주간 AC2 커뮤니티 활동을 다시 하고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글'이 정보 표현 수단으로서 갖는 한계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보게 됐다. 짧은 시간동안 입체적이고 상호 교류적인 학습을 온 몸으로 경험했는데 이걸 다시 선형적으로 정리하자니 참 답답했다. 좁은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학습한 걸 토대로 어떤 시도를 해봤는데, 그럴듯하게 정리된 최종 결과만 있으니 내가 사고한 과정을 온전히 보여주기도 어렵고 피드백받기도 어렵더라.
어찌보면 당연하다. 감동적인 풍경이나 음악을 문자로 묘사하려면 막막하지 않은가. 때론 백마디 말보다 표정 하나, 제스처 한 번으로 감정이 더 쉽게 표현되지 않는가. 인간의 뇌가, 신경세포들이 그토록 복잡하게 3차원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걸 1차원의 글로 나타내는 게 쉬울리 없다. 뇌에 넓게 퍼져 있는 깨달음을 몇 가지 패턴으로 압축해서 표현하려면 정보 손실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전문가가 하는 말만 듣고, 글만 보고 그들처럼 전문성을 기르기 어려운 이유 아닐까. 인코딩 과정에서 암묵지가 죄다 날아가버려서.
그렇지만, 심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인간의 작업기억에는 한계가 있으며, 글에는 '위에서 아래로' 같은 순서가 내재되어 있지만 정보의 차원이 올라갈수록 어디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또는 내 뇌에 전달하려면 순서를 정의하고, 패턴으로 만들고, 청크로 묶어야 한다. 안 그러면 소화하기가 어렵다.
자,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보면 좋을까.
- 먼저 내 생각을 발산하고 빌드업해나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구를 사용해본다. 워크플로이와 노션 대신 스프레드시트와 화이트보드.
- 워크플로이가 1차원이라면 스프레드시트는 2차원, 화이트보드는 3차원이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까지 표현하여 4차원이 되면 그게 동영상이려나.
- 갈수록 더 자유롭고 신경세포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대신 정렬하거나 순서를 잡거나 구조화하기는 어려워진다. 정보 밀도도 점점 낮아진다.
- 화이트보드 도구로는 Google Jamboard를 써봤는데, 완전히 자유로운 도구가 아니라 공간에 제한이 있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는 식이라서 흥미로웠다. 자유에 제약을 준 대신 순서를 나타냄으로써 정보 전달이 좀 더 용이하게 만든 느낌.
-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고차원 도구를 적극 활용한다. AC2 패치에서 들은 '전문성 인터뷰'에서도 주요한 테크닉은 전문가의 뇌를 넓고 깊게, 함께 그림 그려가며 파고드는 것이었다(Task Diagram, Critical Incident Method).
- 이렇게 얻은 고차원 정보를 오로지 1차원 글만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를 버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림이 변해가는 과정의 스냅샷을 캡처하거나, gif로 만들 수도 있겠다. 고차원 정보에 패턴을 만들고, 그걸 글 안에 링크로 건다.
- 전문성이 담긴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 압축되면서 잃어버린 정보가 많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행간에 숨은 암묵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가능하다면 전문가에게 시연을 부탁하고, 함께 뭔가 해보기를 부탁하고, 행동을 관찰하면서 빈 부분을 채운다. 나도 전문가의 행동을 따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