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분기가 이미 지났다. 3개월 좀 넘는 시간동안 코칭과 멘토링을 포함한 1:1 대화를 상당히 여러 번 했다. 이러한 대화에서는 주로 상대방이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들으며 그의 내면을 함께 탐색하게 되는데, 사안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통찰이 생기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는 유일하고 뭉뚱그린 해석에 거부감을 느끼며 다양성에 큰 가치를 두는 내 성향이 큰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작은 대략 15년 전, 한 교수님과의 상담 자리에서 Fred Brooks의 <Mythical Man-Month>라는 책을 추천받은 때부터였다. 1975년도에 출판된 고전이었고, 전공만 전산학이었을 뿐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던 나조차도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내용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했지만 개발자로서 경험이 쌓여갈수록 책의 몇몇 문구가 기억에서 떠오르며 곧잘 인용하게 되더라. 제목이기도 했던 ‘맨-먼스는 미신이다(늦어지는 프로젝트에 사람을 더 투입하면 오히려 더 늦어진다)’보다도 내가 자주 인용했던 문구는 ‘은총알은 없다’ 였다. 소프트웨어 세계에는 늑대인간을 한 방에 죽이는 은총알 같은 완벽한 기술이나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문구를 자주 써먹다 보니 위대한 철학이나 개념이 흔히 그렇듯 이게 다른 분야에도 잘 들어맞으며, 어쩌면 삶 전반에 적용했을 때 건강한 정신과 만족스러운 커리어를 지속하는 데에도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삶에 은총알은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내 안에서 세 갈래 행동전략으로 분화되었다.
- “그건 여러 패턴 중 하나일 뿐이야.” → 패턴인 줄 몰랐던 것을 패턴으로 인지하기
- “이번에는 한번 다르게 해볼까?” → 의도적으로 패턴을 깨고 도전하기
- “지금은 리스크 감소를 위해 그대로 하는 게 좋겠다.” → 현 상황에서 유리한 패턴을 선택적으로 따르기
이 전략들은 스타트업이라는 변화가 극심한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발전시킨 것이었으나, 요즘은 스타트업 외부에서도 변화가 너무 심해서 전략의 유효성이 더욱 커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가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정리해두면 이후의 코칭을 비롯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이 글을 적는다. 참고로 글에 나오는 예시는 전부 내가 실제로 듣거나 읽었던 말을 각색한 것들이다.
“그건 여러 패턴 중 하나일 뿐이야.”
나는 은총알은 없다, 즉 ‘어떤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완벽한 기술이나 방법론이 없다’는 개념을 ‘모든 말과 행동의 가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로 받아들였다. 완벽성에 대한 의심은 유일성, 또는 절대성에 대한 의심과 잘 들어맞는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절대적으로 믿는 진리는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뿐이다. 어렸을 때 풀었던 5지선다 객관식 문제에서 ‘모든 A는 B이다’, ‘C는 D가 절대 아니다’ 류의 보기가 대부분 틀린 답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구체적 컨텍스트나 전제조건 없이 주어진 텍스트를 의심하고, 구체화하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도를 곧잘 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절대명제’를 ‘특정 상황에서 잘 들어맞는 가설’로 인지하려는 시도다.
예를 들어 “그 친구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잘 했거든.” 같은 말을 들으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학창시절이 정확히 언제일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검정고시? 함께 다녔던 학원?
- ‘공부를 잘 했다’는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 영단어를 잘 외웠다는 건가? 수능 점수가 높았다는 건가?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건가? 대학교 최종 학점이 좋았다는 건가?
- 모든 종류의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리라. 화자는 그 친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분야의 공부를, 왜 잘 한다고 느꼈을까? 화자는 그 친구와 함께 어떤 경험을 했나?
또는, 직장에서 “오전에 이메일 오픈율이 높으니까 마케팅 이메일을 오전에 보냅시다.” 같은 말을 들으면 이렇게 질문한다.
- ‘오전’은 누구에게 오전인가? 타겟 고객과 우리의 시간대가 동일한가?
- ‘오전에 이메일 오픈율이 높다’는 건 우리의 기존 마케팅 이메일 오픈율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것인가? 아니면 연구 결과인가? 이번 마케팅 이메일이 이전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가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 연구가 있다면 그 연구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가? 연구 대상의 특성이 우리 고객들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가? 어떤 근거로?
내가 이렇게 명제를 패턴으로 바꾸는 질문 방식 또한 어느 정도 패턴화되어있다. 가까이서 보기, 멀리서 보기 두 가지다.
가까이서 보기
나는 “A는 B이다”라는 문장을 보거나 들으면 아주 가까이 붙어있는 두 점이 연상되면서 둘 사이를 떨어뜨려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두 점이 딱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면 둘 사이의 넓은 갭을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고(모든 A가 언제나 B는 아니다), 다시 그 갭을 메워주는 징검다리도 찾을 수 있다(이러한 A일 때 저러한 B일 확률이 높다).
- 오전에 이메일 오픈율이 높다니까 우리도 마케팅 이메일을 오전에 보내자.
- → 근거자료를 보니 오전 어느 때라도 좋은 게 아니라, 9시~11시 사이에 다른 시간대보다 오픈율이 높은 것이었다. 또다른 자료에서는 오후 1시도 제시했고, 화요일도 제시했다. 오픈율뿐 아니라 메일 내 링크 클릭율을 포함해 조사한 자료도 있었다.
- → 우리는 한국시간 기준으로 발송할 테니 한국 시간대에 있는 고객들에게만 유효한 전략이다. 이번 캠페인은 한국 고객들에게만 시행하거나, 고객의 시간대에 맞춰 발송 시간을 달리 하자.
멀리서 보기
그냥 보면 A에서 B로 가는 연결이 자명하게 느껴지더라도, 충분히 멀리서 보면 A에서 B가 아닌 다른 지점으로 가는 경로를 찾거나(A는 어떤 조건에서 B가 아니게 될 수 있을까?) A가 아닌 다른 지점에서 B로 가는 경로를 찾을 수도 있다(A 외에 B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
- 한국 고객들에게 한국시간 오전 9시~11시에 마케팅 이메일을 보내면 그 외 시간보다 오픈율이 높을 것이다.
- → 이미 저 시간대에 너무 많은 이메일을 받고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메일을 클릭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기존 메일 발송에 대한 통계를 찾아보자.
- → 발송 시각 외에 오픈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혹시 우리의 메일 발송 계정이 스팸 필터에 걸리고 있진 않을까? 제목을 A/B 테스팅해보면 어떨까?
“이번에는 한번 다르게 해볼까?”
이러한 의문 폭격을 던지다 보면 다양한 실험을 할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른다. 특히 불확실성이 높을 때는 적절한 질문으로 메타인지가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뇌가 훨씬 말랑말랑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습관적으로 따르고 있는 패턴도 깨보고 다르게 행동해보면 재미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당연한 게 남에게는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타인의 시각을 경험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최근 내가 경험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30여년간 문자로만 책을 읽어왔지만 요즘은 리디북스에서 TTS (Text-To-Speech) 기능으로 책을 자주 듣는다. 리디북스 전자책을 선물받아서 읽어보려는데, 따로 책읽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시도해보니 경험이 생각 외로 괜찮아서 애용하고 있다.
리디북스의 TTS는 괄호 속의 단어나 문장을 읽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책 내용을 파악하는 데 딱히 불편함이 없었다. 책 듣기 얘기를 꺼내면 책에 도표나 그림이 많지 않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는데, 대개 그림 설명만으로 충분해서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글을 쓰거나 웹페이지를 만들 때도 괄호가 문장의 이해나 흐름에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그림을 설명해주는 대체 텍스트가 괜히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저시력자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된 것이다.
(반면 Audible로 구매해서 들었던 한 전자책은 괄호 속도 읽어주었는데, 그랬더니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서 아예 듣는 걸 포기했다. 아직 표본이 적어서 이게 Audible의 서비스 정책인지 그 책을 녹음한 성우 또는 출판사의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성 안에 정보 양이 더 많으면 고객이 더 만족할 것이다’ 같은 명제를 의심 없이 따른 게 아닐까 싶다. 차라리 ‘괄호 열고’ ‘괄호 닫고’ 까지 읽어줬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명제를 패턴으로 인지하고, 패턴을 깨서 여러 선택지를 만드는 사고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양자택일의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고 더 현명한 선택을 한다
만약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만 떠오른다면 의심하고, 대안을 찾아보고, 장단점을 분석해봄으로써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고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어진 해결책이 하나뿐이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최소한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그 해결책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일단 선택지 두 개가 나오면, 두 선택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지점들 또한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고, 선택지 사이의 장단점을 비교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억지로 각 선택을 비교하기보다는 어떤 선택이 어떤 과정과 결과를 불러올지 시뮬레이션해보고,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더 작게 실험해보는 게 좋다.
- 이 비싼 3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할까 말까?
- → 이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내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그걸 꼭 이 교육에 완전히 참여해야만 얻을 수 있는가? 잠깐 체험해볼 수는 없나? 첫 2주 정도만 들어보면 안 되나? 참여 후 나와 맞지 않는다면 취소하는 건 가능한가? 그 때 리스크는 무엇인가? 아예 참여하지 않고 액기스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실패를 예방하기보다는 예상함으로써 생존가능성과 회복탄력성이 높아진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가진 바가 많아질수록 ‘실수와 실패는 줄일수록 좋다’는 실패 예방 프레임에 갇히기 쉽다. 소위 안전 제일 방침이다. 하지만 실패를 예방하려 하는 힘이 강해질수록 혁신과 통찰을 방해하는 힘 또한 강해지며, 실패하지 않을 완벽한 해결책을 찾느라 동작 또한 굼떠진다. 오랫동안 크게 변하지 않아도 괜찮은 환경이라면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완벽주의가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유일하고 절대적이고 완벽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가정과 실험의 프레임으로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실패에 좌절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예상함으로써 관대해진다. 실패를 이용해 어떤 시도든 관찰해서 개선하는 기회로 삼는다.
- 인터뷰를 오랫동안 준비해서 좋은 질문을 하면 좋은 답변을 얻을 거야.
- → 좋은 질문을 하면 좋은 답변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좋은 답변을 얻기 위해 어떤 다른 방법들을 쓰면 좋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답변은 무엇인가? 이 인터뷰의 목적이 무엇인가?
-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 적응을 못할까봐 두려워.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 → 적응을 못한다는 게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고, 갔다와서 힘들어하고… 이런 현상을 말하는 거라면,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니만큼 적응을 못 할 확률이 잘 할 확률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자. 애초에 적응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실제로 적응 못했을 때 충격이 덜하고, 적응을 잘 하면 훨씬 기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적응을 못하면 지켜보다가 여러가지 시도해보자. 정말 안되면 유치원을 바꿀 수도 있고 홈스쿨링을 할 수도 있다.
“지금은 리스크 감소를 위해 그대로 하는 게 좋겠다.”
패턴를 인지하고 깨는 데 장점이 많지만 당연히 이것 또한 은총알이 아니니 단점이 있다. 의심 모드를 유지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들며, 이런 대화 방식이 잘 맞지 않는 사람과 협업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모든 믿음과 명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불안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키보드 자판을 치면 글자가 나올 것이고, 내가 탄 비행기가 갑자기 추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이 물리학적으로는 진실에 더 가깝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대개 고전역학으로도 충분한 것과 비슷하다. 나는 ‘고전역학 ↔ 양자역학’의 관계가 ‘양자택일 ↔ 두 선택지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가능성’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후자의 가치가 높더라도 전자가 무가치한 건 전혀 아니다.
따라서 365일 내내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대신 받아들이기 모드도 활용하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가능성을 인지하며 다른 해석의 여지를 조금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중요한 건 언제든지 의심 모드와 받아들이기 모드 사이를 내 의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모드, 즉 기존 패턴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은 언제일까?
지닌 에너지를 아껴야 할 때
의심 모드에서는 인지 수준을 높게 유지하며 나와 내 주변에서 흘러다니는 텍스트와 개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때로는 의도적으로 손가락에만, 때로는 달에만 집중해야 한다. 주장의 근거를 캐묻고 정확히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캐물어야 한다.
이 모두는 의심 모드를 시전하는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에너지를 아껴 다른 곳에 더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또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 모드에 착수하기 충분한 여유가 없다면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다. 물론 이 때에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받아들이기 모드를 선택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한 채로 넘어가는 게 나중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더 수월할 것이다.
고점을 낮추더라도 저점을 높여야 할 때
안정적인 패턴은 분산이 작다. 즉 리턴이 크지 않은 대신 리스크도 작다. 새로운 패턴이 야기할 리스크가 너무 크고 그걸 감수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기존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더 낫다. 핵발전소나 비행기와 같이 생명이 직결된 환경에서, 꼭 따라야 하는 프로세스를 깨고 자신만의 패턴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곧 대형사고를 치거나 해고될 것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프로세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따르도록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어디선가 빈틈이 생긴다.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맥락과 목적은 잊어버리고 프로세스 자체만을 신봉하면서 지나치게 경직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프로세스가 조직의 애초 목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구성원들은 그 목적을 이해하여 체화한 채로 따르고 있는지, 프로세스 구축 이후 변화된 환경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프로세스가 아직 유효한지 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여 패턴을 미세조정하며 살아있게 만드는 게 좋다고 본다. 하물며 스타트업처럼 내외부 변화가 심하며 고점을 높여야 하는 조직에서는 죽어있는 패턴을 훨씬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결론 및 요약
우리는 수많은 패턴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패턴을 따르는 게 유리할 때도 많으며 그렇게 하면 대개 안전하지만, 완벽한 패턴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맹목적으로 패턴을 따르기만 하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일상과 직장에서 시도할 만한 세 가지 행동전략을 제시했다.
- 패턴인 줄 몰랐던 것을 패턴으로 인지하기: 가까이에서 볾으로써 주장의 빈틈을 찾고, 멀리서 볾으로써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찾아보자.
- 의도적으로 패턴을 깨고 도전하기: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선택지들 사이에도 공간이 있음을 기억하자. 새로운 실험은 당연히 잘 안 될 가능성이 높으니 실패를 예상하고, 관찰하고, 학습하자.
- 현 상황에서 유리한 패턴을 선택적으로 따르기: 패턴을 깨보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없다면 주어진 패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 리스크가 높아 고점을 낮추더라도 저점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당장은 패턴을 따르더라도 나와 조직 안에서 패턴이 팔딱팔딱 살아있게 만들자.
이 글은 기존 패턴을 무조건 거부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패턴을 그냥 따르는 게 훨씬 쉽지만 단점이 있으니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으면 유리하다는 주장에 가깝다. AI와 기후변화, 인구구조 변화 등으로 인해 당장 5년 뒤 한국과 지구가 어떻게 바뀌어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깨어있는 상태로 패턴을 인지하고, 패턴을 선택적으로 따르고, 때론 습관화된 패턴도 부숴보는 습관을 가지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더 오래, 더 만족스럽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정리함으로써 나의 생존 가능성도 조금이라도 올라갔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