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용데이터를 떠난지는 두 달, 인공지능 번역 스타트업 XL8에서 프론트엔드 리드로 일하기 시작한지는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 블로그 글로부터도 한 달이 지났다) XL8은 이제 2년 반쯤 된 회사고, 내가 대략 13번째 구성원이다. 지난 한 달을 키워드로 표현하면 “적응, 욕심, 만족” 정도가 되겠다.
적응
XL8의 근무 환경은 지금까지 내가 일해 왔던 환경과 많이 달라서 초반 적응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예를 들면 이런 점들이 달랐다.
- 미국에 본사를 두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한다.
- 다른 시간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원격으로 협업해야 한다.
- 영어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이 높다. 특히 거의 모든 이메일이나 공식문서는 영어다.
- 한국 지사도 있고 오피스도 있긴 하지만, (아직 코로나 상황이라) 출근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 근무 시간을 스스로 정하며 휴가의 제한도 없다. 오로지 성과로 평가한다. → 한국 지사가 생기면서 한국 노동법을 따라 15일 + α 로 변경되었다.
실제로 일을 해보니:
- 다행히 영어 읽기와 듣기에는 별 문제가 없고, 영어 글쓰기는 생각보다 빨리 적응되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한글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회사 공식 언어는 영어이고, 그래서 얼마 전 팀 리드 회의에서 기록으로 남는 공식문서는 웬만하면 영어를 쓰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원온원이나 일부(?) 슬랙 메시지를 제외하면 영어로 글쓰기 시작했다. 회의에서도 일단 처음엔 한글로 기록하더라도 영어로 재작성하는 식이다. 가장 큰 장점은 글을 두 번 쓰는 효과가 있어서 훨씬 정리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가장 큰 단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갈수록 익숙해지겠지.
- 영어 말하기는 생각보다 할 일이 없었다. 조직도상 세일즈 팀은 거의 외국인이고 엔지니어링 팀은 거의 한국인인데, 세일즈 팀과의 협업이 아직까지 많지 않은 것이 주 원인이다.
sales-eng
라는 슬랙 채널이 하나 있긴 하나 거의 CEO, CTO님만 거기서 함께 대화한다. 어떤 면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자기 일 집중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중요한 내부 고객으로부터의 피드백과 요청이 덜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주에는 첫 타운홀 미팅도 열려 모든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다른 커뮤니케이션 채널 활성화 방안도 리드들끼리 고민 중이다. 개발팀 전체 미팅도 (내가 오기 전에는 원래 영어로 말했었고) 월 1회는 영어로 얘기해보기로 했으니 영어 말하기의 기회는 점점 늘어날 것 같다. -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팀 스케일 업이다. 아직은 (특히 엔지니어링 팀은) 한국인 비중이 훨씬 많은 회사지만 갈수록 더 글로벌하게 동료를 구할 것이고, 나중에 합류한 외국인 동료가 이전의 컨텍스트를 쉽게 파악하려면 기록이 영어로 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도 영어 말하기가 어렵지 않아야 한다. 영어로 말하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부 표현하지 못하고 대화의 효율이 좀 떨어진다는 단점도 큰데, 또 한편으로는 (말을 잘 못하니까) 감정이 배제되어 더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으며 곁다리로 빠지지 않게 된다. 하지만 영어 말하기와 글쓰기 정책으로 인해 기록의 양이 줄어들고 대화가 줄어든다면 주객전도니, 리드로서 팀원들의 행동을 잘 관찰하고 유도해야 한다.
- 전세계 대상 서비스라는 점은 아직 특별히 실감되지는 않는다. 새벽에 이메일이 와있다는 정도? 회사 연차 대비 매출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B2B 위주라 고객의 ‘수'는 절대적으로 많지 않기도 하고, 대부분 CEO/CTO님이 고객 응대를 하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세일즈 팀을 비롯한 내부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처럼, 외부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주기 등도 정리/개선될 필요는 있다.
- 미국에 있는 동료와의 원격 협업은, 원격은 별 문제가 아닌데 시간대가 다르다는 건 꽤 큰 문제였다. 대면 미팅을 할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국 오피스는 GMT-8, 한국은 GMT+9니까 17시간(또는 7시간) 차이다. 즉 우리의 월요일은 미국의 일요일이고, 미국의 금요일은 우리의 토요일이라서 기본적으로 미팅 가능한 시간이 화수목금 4일뿐이다. 시간대 차이 때문에 그 4일동안도 슬롯이 3시간씩(KST 09시-12시)밖에 없다. 따라서 미팅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해야 한다. 대면으로 논의해야만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잘 구분하여 비대면/비동기로 할 수 있는 논의는 최대한 미리 하고, 미리 미팅 노트에 아젠다 다 준비해서 각자 기록해두고, 미팅 퍼실리테이션 잘 해서 시간 지키도록 하기.
- 위와 엮여서 거의 완전 재택근무다 보니 나의 근무 시간을 스스로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09-18 또는 10-19인데 미국과의 미팅을 8시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오후에 운동을 하거나 여은이 등하원을 시키거나 놀아주기도 하니까. 그래도 이제는 저녁먹은 뒤에는 최대한 가족들과 함께하고, 오전에 근무 시간을 조절하는 식으로 어느정도는 패턴이 정착되었다. Huberman Lab에서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주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 시청한 뒤로 아침을 안 먹고 있는데 이게 오전 시간 활용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근무시간보다는 성과가 중요한데, 성과평가 기준 및 프로세스는 아직 (의도적으로) 빡빡하지 않게 잡혀있다. 룰을 줄이고 자율성에 맡겨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을 뽑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렇다고 들었다. 물론 이제 팀 스케일이 점점 커질수록 이것들도 더 필요할 것이다.
- 출퇴근을 안하는 건 정말 편하다. 그런데 개인 시간이 늘어날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가족을 위한 시간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그만큼 지원씨가 더 여은이를 오래 돌봤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출퇴근을 안하니 핸드폰으로 읽던 기술 뉴스도 훨씬 적게 보게 되고, 운동량도 줄었다. 즉 이런 공부와 운동을 위한 시간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참 여러모로 자율성을 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요즘 많이 게을러졌다. 다시 좀 추슬러야지.
욕심
XL8은 아직 작은 회사고 시니어 위주다 보니 룰, 프로세스, 가이드 등이 많지 않았다. 채용 과정에서, 이제는 프론트엔드 팀도 생길테니 더더욱 회사가 스케일업을 대비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얘기를 나눴다. 따라서 내가 팀 리드로서 XL8에 합류하면 그러한 체계를 잡아주기를 기대한다고 들었다. 나 또한 한국신용데이터에서 리드 하면서, 블로그 하면서, AC2 패치 들으면서 점점 더 ‘좋은 팀과 좋은 제품을 위한 영향력’이라는 주제가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큰 회사보다는 작은 규모인(매출이 탄탄한) XL8로 이직했다.
실제로 들어가서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많이 보여서 스스로 압박이 생겼다. 원래는 내가 원하는 변화가 있더라도 천천히 관찰하고 설득하면서 변화를 유도하려 했는데 CEO와 CTO님이 모두 내가 원하는 변화에 대해 굉장히 열려 있었고 계속 날 도와주려고 하셨다. 점점 더 욕심을 내게 됐고, 실제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물론 나 혼자 하자고 한 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CTO님이 만들고 싶었던 변화를 내가 신규입사자 찬스를 써서 도와드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 프로젝트 관리 도구의 변화: Jira → Shortcut. Jira는 워크플로우가 다르면(e.g., 팀이 다르면) 스페이스가 분리되면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여러 팀이 협업하는 그림이 한 눈에 안 들어오는 게 가장 주요한 이유다. KCD에서의 경험을 얘기한 뒤 시험 도입하게 됐는데 다들 잘 쓰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개발 외 업무에 대해서도 여기에 많이 기록하고 있다.
- 문서 도구의 변화: Google Docs → Notion. 구글 닥스는 Private by default라서 공유를 해줘야만 볼 수 있고 노션은 Public by default라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원래 컨플루언스를 쓰자고 얘기했었는데, Jira를 안 쓰니 아예 아틀라시안을 벗어나서 다른 도구를 시도하게 됐고 노션이 적절했다. 컨플루언스나 구글 닥스처럼 공동 작업시 커서가 문자 단위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정도면 충분.
- 소통 채널의 변화: Email 위주 → Slack 위주. 사실 이메일을 기존에도 아주 많이 쓴 건 아니었지만, 이메일로 얘기하면 나중에 합류한 멤버가 검색해서 보기 어렵다는 점에 공감하셔서 슬랙과 노션으로 소통 채널이 더욱 옮겨갔다. 그리고 나는 이메일로 알림 오는 게 싫어서 최대한 슬랙의 integration을 이용하여 알림도 슬랙으로 오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Github PR 리뷰용 도구로 Axolo라는 걸 써보기도 했는데, 매 PR마다 채널이 생기는 게 신선했지만 부담스러워서 다시 기본 integration으로 롤백했다. 대신 깃헙과 슬랙을 연결해서 깃헙의 멘션이 슬랙 유저네임으로 멘션되게는 변경.
- 목표 설정 방식의 변화: 기존에도 OKR을 사용했지만, OKR이라기보다는 거시적 ToDo에 가까웠다. 마침 내가 홍영기님에게 배운 OKR 운영 방식에 꽃혀있던 터라, 여러 미팅을 퍼실리테이션하면서 OKR을 더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만든 Objective와 Key Results를 숏컷에서 Milestone과 Epic으로 등록하고, 주기적인 팀 리드 싱크 시간에는 Epic 위주로 프로그레스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대부분 투명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를 제안한 것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논의를 거쳐 잘 수용되었다. (내가 욕심을 버린 것도 꽤 있고) 이외에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를 벗어나서 뭘 하면 될지 아는 상태는 되기도 했고, 차분하게 마라톤이라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계속 들었다. 그래서 조바심을 버리고 2주에 하나 정도씩만 의제를 다루기로 했다. 이번주에 다룬 주제는 QA 프로세스 및 배포 정책이었는데 30분만에 정리가 아주 깔끔하게 됐다.
만족
입사하면서, 상반기에 달성하고 싶은 3가지 개인목표를 세웠다. 일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 XL8 팀에 성공적으로 온보딩한다.
- 2주간의 온보딩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다.
- 현재 내게 주어진 온보딩 자료들을 이해하고, 질문하고, 개선한다.
- 회사를 이해하고, 제품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이해한다. 이 과정을 문서로 남긴다.
- 여러 동료들과 협업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는다.
- 프로덕 오너로서 역할을 다하며 상반기 ENG OKR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걸 돕는다.
- 동료들의 의견을 여러 방법으로 잘 받아, 상반기 개발팀 OKR을 제이/케이와 함께 잘 수립한다.
- 수립한 OKR을 개발팀 내에서 잘 공유하고, 각자가 잘 이해하고, 그걸 토대로 각 팀에서 단/중기적 작업 우선순위를 잘 정하도록 돕는다.
- 제이와 함께 개발팀이 효율적으로 함께 일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고, 그럼으로써 엔지니어링 목표의 상당 부분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 결과적으로, 엔지니어링 목표의 상당 부분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서 팀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성장하고, 만족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 성과가 좋고 훌륭하게 협업하는, 성공적인 팀 = Teamwork Big 5가 높은 팀으로 정의. 이걸 증진시키는 문화, 환경, 도구, 프로세스를 수립한다.
- 코드 및 UX 일관성과 개발 생산성을 위한 도구와 환경에 지속적으로 투자
- 베스트 프랙티스, 컨벤션, 가이드라인 정비 및 리팩토링
- 패키지 버전 관리, 정적 어셋 관리
- 디자인 시스템
- 서로의 작업과 성과가 잘 공유되고, 서로를 도와주기 쉬운 구조 만들기
- 일일 회고, 정기 미팅(주 2회), 1:1
- 주간 회고, 분기별 회고
- 과할 정도의 기록, 공유, 축하, 감사
- 상호 확인을 거치는 의사소통
- 상호 신뢰, 심리적 안정감, power of vulnerability
- 운영 업무 로테이션
- 팀원들의 커리어 목표를 함께 정하고, 역량 성장을 돕는 구조 만들기
- 직군별 커리어 래더 설계
- 각자의 동기 파악, 커리어 목표/개인 역량 목표 설정, 돕기 (via 동기면담, 코칭)
- 개인과 조직에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 동기부여가 부족한가? → Goal Setting 프레임워크, Effectuation
- 방해요인이 있는가? → The human element
주기적으로 개인 목표 달성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셀프 체크를 하는데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스럽다. 주변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프론트엔드 팀으로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와 “회사, 팀, 제품을 이해하기"라는 문서를 작성하면서 할 일들이 많이 정리됐고, XL8에 대한 나의 이해도도 무척 올라갔다. “회사, 팀, 제품을 이해하기"에서 만든 질문은 내가 봐도 효과적이어서, 곧 뉴스레터에서 소개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이직하면서부터 김정훈님과 매주 전화 상호코칭을 30분씩 하고 있는데 멘탈 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 제안 흔쾌히 수락해주신 정훈님께 감사드립니다.
결론: 잘 살고 있습니다. 요즘 개인 시간 대부분을 잡아먹고 있는 뉴스레터 구독하시려면 ⬇️ 클릭하세요 🙂 그런데 이번 주 꺼 보내고 비축분 만들기 위해 2-3주 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