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내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 부모님의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다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걸 깨달았다.
아내와 내가 여은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를 확연하게 느낀다. 특히 여은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엇은 괜찮고 무엇은 안되는지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러하다. 예를 들어 나는 여은이가 바닥 매트에 도장을 찍거나 벽에 낙서하는 건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데 아내는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꼭 지우개나 알콜솜으로 지우려고 한다. 거꾸로, 나는 여은이가 바르는 약이나 가위 같은 걸 가지고 놀 때, 침대나 책상 위로 올라가서 놀 때 무의식적으로 "안 돼"라고 말하는데 아내는 이를 허용해준다.
상대적으로 아내보다 내가 여은이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횟수가 좀 더 많은데, 가끔 아내가 '자꾸 안 된다는데 이유가 뭐냐', '전에는 이 세상에 진짜로 안 되는 건 별로 없다고 하지 않았냐' 같은 말을 하면 내가 딱히 할 말이 없다. 애써 '여은이 몸에 안 좋을까봐, 다칠까봐' 같은 이유를 들어보지만 좀 궁색하다. 여은이에게 '그러면 위험해, 다쳐' 라기보다는 '여은아 안 돼'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여은이가 아주 명확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최초의 몇 단어 중 하나가 '안 돼', '안돼요' 인 것은 분명 내 탓일 거다)
재밌는 건 여은이를 데리고 부모님 댁에 갔을 때, 나에게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 괜찮아진(참을 수 있게 된) 여은이의 행위에 대해 부모님이 예전의 나와 거의 똑같이 반응하신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안 된다고 했던 것들은 내가 원가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삶의 방식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내에서의 규칙은, 그게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간에 대개 '이런 것들은 괜찮아'보다는 '이런 것들은 하면 안 돼'로 구성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규율을 정함에 있어서 어떤 행위가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합리적 이유에 근거하기보다는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만들어진 기준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런 기준은, 내게 그런 기준이 있다는 것조차 애초에 인지하지 못하거나, 상황이 달라졌을 때 유연하게 바꿔서 적용하기보다는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무언가가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나도 조심하면서, (쉽진 않겠지만) 아이에게 안 된다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전에 그게 왜 안되는지, 정말 안되는지, 안된다면 언제까지 안되는 건지를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꼭 가족 규칙에만 적용되는 패턴일까? 회사생활에서도, '개발자라면 당연히', '팀 리드라면 당연히', '회사 대표라면 당연히', 'B2C 제품이라면 당연히' 등등 수많은 당연한 것들이 있으며 이들이 결국 팀 문화, 조직의 문화, 제품의 문화가 된다. 내 조직에 좋은 문화가 있더라도, 그런 문화가 왜 생겼고 그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따위를 반문해보지 않은 채 그저 따라야 하는 것으로만 여긴다면, 문화에 공감도 되지 않을 뿐더러 조직에 변화가 생기거나 본인이 다른 조직으로 떠났을 때 당황하거나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당연했던 것이 여은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니까, 당연함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도전할 때 성장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아이에게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걸 육아 서적이었나, 유튜브였나 아무튼 어디선가 본 적 있다. 똑같은 행위를 두고 나는 안 된다고 하고 아내는 된다고 하면 여은이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그러니 행위 자체에 대한 규칙 하나하나보다는 그 근간에 있는 가치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가정 내에서 합의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이건 회사의 비전과 제품의 비전, 팀의 문화와 규율이 하나로 얼라인되어있을 때 개별 조직 구성원들의 혼란이 줄어들고 일관된 기준에 따라 인재를 채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페이스북에서 은광님이 인사이트가 있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