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L8 이직 1개월 회고를 쓴지 8개월이 더 흘렀다. 마지막 블로그 글로부터는 6개월이 지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간단히 근황을 적어본다.
MediaCAT 퍼블릭 릴리즈
올해 2월에 인공지능 번역 스타트업 XL8의 프론트엔드 리드로 합류했다. 합류 초기에는 프론트엔드 팀 자체를 셋업하고 도구, 문화, 프로세스를 만들어나가는 데 집중했다. 4월부터는 중소형 번역 서비스 제공자(LSP, Localization Service Provider)들을 위한 올인원 미디어 자막 번역 도구를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처음에는 기존 홈페이지에 파편화되어있던 기능을 하나로 엮는 정도로 시작했지만 가면 갈수록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뉴스레터는 한주씩 미루다가 결국 멈춰버렸고, 블로그도 엄두를 못 냈다.
원래는 7월 초에 릴리즈할 계획이었으나 6월 말이 되었는데도 한참 모자란 제품을 보면서 많이 고민했다. 결국 일정을 2개월 미루고 새로 꼬신 디자이너 분에게 오자마자 UI/UX 리뉴얼을 부탁드렸다. 겨우 9월 초 IBC(International Broadcast Conference, 암스테르담 방송장비 박람회)에 맞춰 MediaCAT을 퍼블릭 릴리즈할 수 있었다.
개구리가 우물 밖에 나왔더니 여전히 안개 속
릴리즈 직후는 추석이었고, 숨가쁘게 달리던 사람들 모두 조금씩 쉬면서 어영부영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마케터 분은 네이버 블로그를 열심히 쓰셨다. 그런데…. 알음알음 유입된 사람들이 조금씩 가입해서 쓰고 있긴 했지만 유료 결제가 거의 없었다. 당시 붙여두었던 Datadog을 보니 대부분의 유저가 우리가 기대했던 경험을 하지 않은 채 떠나는 것으로 보였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 불안감이 조금씩 조직 전체로 번져가는 게 느껴졌다.
대표님이 문제제기를 했고, 10월 초부터 제품 그로스를 위한 회의체가 생겼다. 대책회의가 이어졌다. 당시 나는 프론트엔드 리드 겸 미디어캣의 (임시) PM을 맡고 있었는데, 내가 코딩에 쓰는 시간을 확 줄이고 기존 로드맵에 변화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현재 문제를 분석해보고 행동하는 게 우선이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부터 개발자보다는 미디어캣의 PO라는 정체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지인이기도 했던 그로스 컨설턴트 강재영님에게 갑작스레 전화해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내가 가진 시장, 고객, 제품에 대한 이해를 다시 점검하면서 수많은 문서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직접 고객을 여럿 만나고 경쟁 제품을 비교분석했다.
놀랍게도, 결과는 처참했다.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XL8과 미디어캣에는 분명 독보적인 초벌 번역 품질이라는 특별한 강점과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어떤 고객의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것인지 갑자기 너무 모호하게 느껴졌다. 부끄럽게도, 새 회사에 합류하고 새 제품을 릴리즈까지 했는데도 인공지능 번역 시장이라는 도메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다.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제품 개발하는 몇 달 동안 우물 안에 갇혀있던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보니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여러가지 유저 인터뷰와 데이터 분석을 통해, 뭘 하면 제품이 개선될지는 대충 목록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중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유튜버에게는 이게 더 필요하고, 번역가에게는 저게 더 필요하고, LSP 회사들에게는 요게 더 필요하고… 당장 빠르게 움직이고 싶은데 정작 한 발도 제대로 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대표님은 세일즈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시차가 야속하고, 대화하기가 점점 어렵게 느껴졌고, 점차 오해가 쌓여갔다. 내가, 이 제품이, 이 회사가 잘 해나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무력감이 느껴지면서 동기부여 수준이 확 떨어졌다. 이게 3주 전이었다.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주말 내내 고민하다가 10월 24일 월요일에 “우리 다 제쳐놓고 대화 좀 하자”를 시전했다. 대화의 결과가 어떨지 상당히 두려웠다. 하지만 지난 몇주간의 고민과 내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시차고, 미팅이고, 개발이고 뭐고 엔지니어링 리드들끼리 몇시간,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 계셨던 대표님과 1:1로 1시간 더 대화했다.
다시한번 놀랍게도, 결과는 굉장히 좋았다. 여러 오해가 순식간에 해소됐고 신뢰가 다시 빠르게 회복되었다. 나에게는 미디어캣이 목표로 하는 고객이 누구인지에 대한 방향성이 정확히 정해짐으로써, 이제는 움직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 가장 주효했다. 사실 대표님의 생각은 예전부터 꾸준히 “중소형 LSP에 집중한다”였고 그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지금은 유튜버에게 덜 집중해도 된다”는 말이 더 중요했다. 고객이 명확해지니 갑자기 안개가 걷힌 것 같았고 앞으로 2개월간의 제품 업데이트 로드맵을 순식간에 그렸다. 로드맵이 있으니 세일즈 팀에게도 자신있게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나아간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썼다.
최근 몇주간 힘겨운, 그러나 필요했던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 세상 모든 것은 녹슨다. 자전거 체인에, 인간관계에, 개발도구에, 프로세스에, 리더십에 주기적으로 기름칠을 해줘야 한다. 스타트업 리더 역할로 할 수 있는 기름칠의 종류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팀과 제품이 나아가는 방향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간다" 만큼 중요한 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이 방향에서 오는 신호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이다. 리더 본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망각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주기적으로 구성원들에게 알려야 한다(기름칠). 그래야 일정한 방향으로 다함께 움직이면서 속력을 내고, 결과적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문제를 헤집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보니, 어쩌면 한참 뒤에야 밖으로 드러났을 상처에 알보칠을 바르면서 몇개월치 고통을 한달만에 겪은 셈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우리 모두 훨씬 건강해졌다. 스타트업에게 아주 소중한 몇 달, 그리고 그 기간동안 떠나갔을지도 모를 팀원들을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으며 로드맵을 세운 이후로, 입사 초기보다도 훨씬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 향후 PO를 채용하게 되면 이 고통스럽지만 재밌는 역할을 다시 어떻게 나눌지가 벌써부터 걱정되기도 한다. 우리 프론트엔드 팀도 에너지와 희망이 넘치는 게 느껴진다. 우리 팀 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질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를 포함해 다들 일을 너무 열심히, 많이 해서 오히려 자제시켜야 할 수준이다. 그래서 나도 한참 쉬었던 즉흥연기와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갑자기 제품 영업에서도 긍정적 신호들이 많아졌다. 여러 사용자들이 크고작은 피드백을 줬고, 지난했던 B2B 세일즈도 조금씩 성과를 내는 게 보인다. 우리 XL8 한국지사 법인장님은 여기저기서 1등상을 타오시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도 속속들이 찾아온다. 어쩌면 우리가 작은 데스 밸리를 한번 넘은게 아닌가, 이게 J 커브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설레발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미디어캣이 내 기준에서는 출발선에조차 아직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겸손해지자.
고작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PO 역할을 한 건데 그 경험이 너무나 압축적이고, 또 귀했다. 너무 급격히 감정상태가 변해서 내가 조울증인가 잠시 의심하기도 했고, 내 역할과 책임이 커질수록 구성원들에게 끼치는 감정적 영향을 조심해야겠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내가 계속 프론트엔드 리드이기만 했다면 이런 경험을 언제쯤 해볼 수 있었을까? B2B 비즈니스 자체, 그리고 미디어 기계번역을 통해 창출되는 시장에 대해 이제서야 눈이 좀 트인 것 같다. 온보딩에 9개월이 걸린 셈이다.
이번에는 갈등과 문제가 빠르고 긍정적으로 해결됐지만, 한번 생긴 문제는 반드시 다시 생긴다. 문제가 덜 발생하고 더 작은 수준으로 발생하게 하려면 구성원들 사이에 솔직한(취약성을 드러내는) 대화를 더 자주 해야 한다. 다행히 대화는 훨씬 많아졌고, 이번 과정에서 우리의 신뢰가 더 굳건해졌으며, 다음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도 생겼다. 내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