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1년 회고다. 매년 회고를 하다가 여은이 태어난 이후로 회고를 안 했었다. 이전에 회고했을 때도 컴퓨터 기록으로는 별로 안 남아있어서, 이렇게 글로 정리한 회고를 하는 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회고 포맷은 항상 제각각이었는데 올해는 누나가 보내준 질문들이 괜찮아서 이걸로 해본다.
원래 어제(2021년 12월 31일) 쓰고 싶었는데, 어제는 우리 가족의 컨디션이 역대급으로 안 좋은 날이었다. 여은이는 감기, 우리는 체하고 온몸에 몸살.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져서 이렇게 회고를 할 수 있게 됐다.
1. 관심사를 다시 떠올려보며 내가 어떤 걸 좋아했는지
새로 시작했는데 재밌었던 것과 이유
- 글쓰면서 내 생각 정리하기. 엘리스를 떠나던 시절에도 블로그 엄청 열심히 했기 때문에 새로 시작했다고 하기에는 살짝 어폐가 있지만, 그때는 글쓰기가 취미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 3년만에 블로그를 다시 시작한 지금은 시간만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사실 코딩보다 더 재밌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숨어있었는지 몰랐고 이걸 잘 정리하고 싶다. 그래서 내 블로그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나다. 공유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공부하고, 뇌를 정리하고, 아웃소싱하기 위해 글을 쓴다.
- 지난 한 달간 가장 열심히 썼던 글은 ‘나만의 ROI 프레임워크 만들기’다. 아직 공개할 수준으로 다듬지를 못했는데 빨리 끝내고 싶다.
좋아하는 줄 알고 시작했는데 해보니까 별로 재미가 없었던 것과 이유
- 기억 안 난다. 재미없는 건 빨리 잊어버리는 걸까. 애초에 내 관심사는 꽤 잘 정리되어있던 터라..
- 굳이 꼽아보자면 알고리즘 문제풀이 연습이 있겠다. 시작할 때부터 아주 재밌어보이진 않았는데, 이직 준비용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살짝 생기긴 했지만 결국 시간 대비 효용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점점 의욕이 떨어졌고, 그만했다.
2. 기억에 남기고 싶은 컨텐츠
OTT는 예전부터 안 봤고, 집에 TV가 없으니 영화나 드라마도 거의 안 봐서 이쪽은 뭐가 없다.
유튜브에서는 Talks at Google이 최고의 채널이었다. 이건 정말 보물이다.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연구 기반의 반짝이는 통찰을 전해준다. 여기서 본 영상 중 마음에 안 드는 게 별로 없었는데, 하나하나가 깊이가 있다 보니 제대로 정리하고 공부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게 단점이다.
김정훈님이 추천하신 LeadDev에서도 리더십과 협업에 대한 좋은 글과 영상이 너무 많아서 행복했다. 문제는 너무 많아서 정리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는 거. 결국 좀 걸러서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LeadDev가 Talks at Google을 발견해준 것이기도 하다.
- LeadDev의 좋은 글을 긱뉴스에 소개
- Giver and Taker라는 TED 영상이 좋다는 댓글을 받음
- 나도 영상 보니까 내용이 아주 훌륭했음
- 근데 유튜브 추천으로 Talks at Google에서 이 연사가 강연한 긴 버전이 있었음
- 유레카!
우연히 찾은 FE재남 유튜브 채널도 훌륭했다. 주로 운동하거나 집안일하면서 들은 수준이긴 했지만 여기 올라오는 스터디 영상들에서 내가 부족했던 기초적인 JS 지식들을 많이 채울 수 있었다. 책 <Effective Typescript>도 한몫 했다.
팟캐스트는 김창준, 강재영님의 애자일 키워드 하나만 들었다. 들으면서, 10년 전에 AC2를 들었을 때만 해도 죽어있는 지식이었던 애자일 철학과 기법들이 어느새 제법 체화되었다는 걸 느꼈고, 여전히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어 새삼 겸손해졌다.
What makes a great software engineer? 도 좋았다. 긱뉴스와 페이스북 생활코딩 그룹에 지금까지 만나보셨던 탁월한 개발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이었나요? 라는 질문을 올렸고 여기에 김창준님이 논문 한번 찾아보라고 했던 한 마디로 읽기 시작했다. 논문 내용도 아주 훌륭하지만, 이걸 계기로 ‘의문이 있을 때는 그걸 과학적으로 풀어낸 연구를 공부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 논문을 고른다.
마지막으로 무림서부. 예전부터 좋아했던 작가가 쓴, 가상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인데 내용이 완전히 심금을 울렸다. 한 화 한 화 읽을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나의 20년 장르소설 경력에서 이정도 퀄리티의 글은 정말 손에 꼽는다.
3. 매일의 일상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든 것
여은이가 커가면서, 말하면서 부리는 재롱을 보고, 함께 노는 것. 그 행동 하나하나를 아내와, 부모님과 공유하며 행복하게 웃는 것. 체력은 달리지만 너무나 소중하다.
그리고 블로그 글쓰기. 이거 때문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글빨이 잘 받는 날이면 하루가 잘 풀리는 기분이고 그 반대면 왠지 컨디션이 안좋아진다.
4. 소비 돌이켜보기 - 주로 어디에 지출하고 언제 소비를 많이 하는지
마침 최근에 지출 관리를 위한 스프레드시트를 만든 바 있다. 우리 가족은 소비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내년부터는 삶의 질을 올리기 위해 훨씬 적극적인 투자를 할 계획이다. 내년 계획을 세워보니 웰빙을 위한 정기 지출이 총 지출의 20%쯤 되더라(요가, 심리상담, 집안일 도우미, 건강기능식품 등).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지름은 따로 정리했다.
5. 내 삶에 꾸준히 쌓인 것 정리 - 구독하고 있는 서비스, 컨텐츠, 매일 찍는 사진이나 영상
꾸준히 쌓이는 컨텐츠는 역시 여은이 사진과 영상, 그리고 내 블로그 글이다.
구독하는 무료 뉴스레터는 엄청 많아서 유료 SAAS 구독만 적어본다.
- Youtube Premium
- Workflowy
- Notion
- 1password
- Bearable
- iCloud
6. 올해 고생한 나에게 어떤 쉼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은가?
모든 알림을 꺼두고 카페 가서 글쓰기. 마사지 한 번 제대로 받기.
7. 한 해 동안 가장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던 순간의 기억
- 연초에 한 고객의 공동인증서 관련된 문제를 한달 넘게 파고들고, 결국 해결하여, 고객분이 보내주신 감동의 메시지를 읽었던 순간.
- 캐시노트 앱 2.0 리뉴얼의 웹 프론트엔드단을 주도해서 개발하고, 배포했던 순간.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술적 comfort zone을 벗어나서 내가 실현하고 싶었던 구조를 구현하며, 성장도 크게 됐고 기술역량에 대한 인정도 많이 받았다.
- 가을에 프론트엔드 팀 빌딩 경험을 타운홀 미팅에서 발표했던 순간. KCD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일하는 팀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다. 그리고 KCD 프론트엔드 팀원들과 했던 체크인 한 번 한 번이 소중했다. 내가 진심으로 피드백을 주고, 그분들이 받아들여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팀 빌딩이구나, 라는 걸 실감했던 순간들.
- 한 달 넘게 걸려 나의 소개글을 다시 작성해서 공개했던 순간. KCD에서의 3년간이 드디어 나만의 글로 정리되었다.
8. 스스로 가장 별로라고 생각했던 순간, 위축되었던 순간, 슬럼프
연초 프론트엔드 팀 리드를 맡고 팀을 빌딩해가던 초기에, 매니저로서의 나와 개발자로서의 내가 충돌하면서 시간 관리를 못해서 번아웃이 왔다. 내가 테크 리드를 하기에 기술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걸 메꿀려고 노력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더 큰 임팩트를 주는 것이고, 팀으로 일하면 혼자 일하는 것보다 더 큰 임팩트를 내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받았던 책(<개발 7년차, 매니저 1년차> 등)을 읽어서인지 동료 리드와의 대화에서 깨달은 건지, 아니면 프론트 팀을 팀원들과 꾸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깨달음 이후로 야근도 줄고, 번아웃도 회복되고, 훨씬 더 재밌게 리드 역할을 하게 됐다.
9. 일하는 나 - 무엇을 배우고 발견했는가?
서브질문이 3가지(가장 재미있었던 일, 심리적/물리적으로 힘들었던 일, 새롭게 도전했던 일)인데 다 위에서 얘기했으니 패스.
10. 2021년에 만난/영향받은 사람
새롭게 만나서 가까워진 사람
- 우리 프론트엔드 팀원들, 그리고 KCD의 훌륭한 동료들.
- AC2 커뮤니티(디스코드)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만난 분들.
부러운 마음에 질투를 느낀 사람
- 없다. 내게 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아마 있어도 곧 까먹을듯.
가장 고마운 사람
- 지원씨.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우리가 최대한 분담해서 육아를 하기로 했었지만, 어느새 지원씨가 여은이를 돌보는 비중이 많이 높아졌다. 여은이가 나보다는 지원씨를 찾다 보니 나도 거기에 익숙해졌다. 2021년 하반기에 내가 경험을 정리하고 성장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정말 고맙다.
11. 2021년에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5명 -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에너지를 빼앗는 사람
직장을 빼놓고 생각해보자.
- 여은이: 내게 엄청난 힘을 주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빼가기도 한다.
- 지원씨: 우리가 서로 투덜대긴 하지만 다투지는 않는다. 지원씨와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 고등학교 친구들(3명 그룹, 7명 그룹): 얼굴은 자주 못 보지만 이 친구들하고는 아무 얘기나 지껄일 수 있고 편하다.
- 즉흥연기 멤버들: 연습을 몇 번 가진 못했지만 갈 때마다 배꼽빠지게 웃고 에너지가 샘솟는다.
- AC2 멤버들: 예전부터 알고 있던 분들은 물론이고, 초면인 분들과도 굉장히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이게 커뮤니티의 힘인가.
12. 가까운 사람 3명에게 ‘나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들어보기
김정훈님
- 키워드: 로지컬
- 이유: 로지컬 합리적, 논리적 이유를 항상 찾으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아서요.
- 내가 보내드린 정훈님 키워드는 ‘다윗과 골리앗’
- 골리앗: 문제를 한 면만 보지 않고 다각도로, 여러 측면에서 보신다. 공의 한 면만 보는 게 아니라 일어서서 뒤쪽도 보는 등.
- 다윗: 엄청 큰 문제도 차근차근 할 수 있는 만큼 도전하신다.
데미안(김성현님)
- 논리적
- 단순히 Task를 넘어서 세상의 문제 있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 때로는 인간 세상에서 직감 혹은 경험이라는 근거로 논리적인 생각의 전개를 멈추곤 하는데, 테드는 특히나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메타적인 질문을 잘 던지시고, 결국 스스로의 답을 잘 만들어내신다고 생각해서 논리적이라는 형용사의 하위에 메타라는 단어도 포함시키고 싶네요.
- 유연한
- 논리적이고 이해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부족할지라도 떄떄로 유연함을 발휘하셔야할 때에 발휘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투명한
- 드러나는 언어와 행동에서 의도하시는 바를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기 떄문에, 소통을 할 때 혼란을 주지 않고 오해를 만드시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 내가 보내드린 데미안 키워드는 ‘토끼와 거북이’
- 거북이: 때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디테일을 살피며 끈기있게 문제를 풀 줄 안다
- 토끼: 근데 달려야 할 때는 속도감 있게 달릴 줄 안다
지원씨
- 키워드: 솔직함과 엉뚱함
- 이유: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하는 사람이어서. 지금 이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함. 그래서 엉뚱한 타이밍에 얘기하기도 함
- 내가 지원씨에게 보낸 키워드는 ‘따뜻함과 강인함’
- 따뜻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본인도 따뜻하게 대한다.
- 강인함.. 이건 설명하기 어렵다. 의외의 측면에서 강하다고 느낀다.
13.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썼는가 - 시간의 카테고리화, 순위 매겨보기
직장에서는 코드리뷰를 비롯한 팀 매니징에 60~70%, 개인 코딩에 30~40% 정도 썼을듯.
일상에서는 직장 8시간 빼고 평일 16시간, 주말 24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 잠: 6-7시간
- 여은이 돌보고 집안일: 평일 약 3시간, 주말 약 10시간
- 블로그 글 쓰기, 공부하기: 평일 주말 모두 약 3시간
- 사람들 만나는 건 대략 평균내보면 일주일에 한번은 만났던 것 같다. 그러면 주당 3시간?
14. 2021년을 대표할 수 있는 3가지 키워드
도전, 성장, 도전
- 도전: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서 기술 역량과 매니징 역량을 모두 키우는 도전을 했다.
- 성장: 이 과정에서 둘 모두 크게 성장했고, 팀원들을 멘토링하는 게 무척 즐거웠다.
- 도전: 그 성장을 잘 정리하고 나니 새로운 도전을 위한 갈망이 생겼다. 그래서 오랜 기간 탐색 끝에 이제 XL8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도메인으로 간다.
환경도 달라지고 일하는 방식도 달라지지만, 나는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15. 2021년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것
- 날씨 따뜻할 때 운동 많이 해두고 체력 길러서, 여은이와 더 많이 더 화끈하게 놀아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유지하고 싶은 것
- 나머지 모두. 후회되는 게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