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회사에서 일 안해도 되는 주간으로 선사해준 Slow Week 때 가족 프로젝트로 아내의 블로그를 개편했다. 언어치료사인 아내는 퍼스널 브랜딩을 만드는 동시에 다른 언어치료사들이 찾아올 만한 블로그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도메인은 좀 다르지만, 내가 스타트업에서 여러 개발자 이력서를 봐왔던 걸 기반으로 담백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소개글을 함께 작성했다. 요즘 아내는 논문을 읽고 언어치료에 적용해볼 만한 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힘들지만 즐겁게 블로깅을 하고 있다.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세어보면 얼마 안 된다
그러던 중, 아내가 자주 조언을 듣는 지인에게 블로그와 퍼스널 브랜딩 얘기를 꺼냈더니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을 잘 세어보면 생각보다 얼마 안 된다, 영향력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길 바란다”는 말을 해주셨다고 하더라. 작년도 올해도 개인 목표 키워드 중 하나가 ‘영향력’인 나에게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문득, 내 삶에 큰 + 좋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돌이켜보고 기회가 될때마다 연락해 감사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큰 영향을 받은 사건에 대해서는 정리해서 내 소개글에 남겨두었지만 명시적으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을 제외하고) 현재 내 삶을 중요하게 구성하는 요소들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대략 시간순으로 정리해봤다. 목록을 들여다보니 대부분은 내게 ‘변화의 계기’가 되어준 사람들이며, 2007년 이전의 사건은 전무하다. 분명 더 어린 나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 많았겠지만 그 충격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흡수해버려서 그럴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게 원래의 나라고 생각했을법도 하다.
변화 계기, 변화 유지, 관성의 법칙
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기억에 잘 남았을까? 어쩌면 사람도 관성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개 자기가 가고 있던 방향으로만 계속 움직이려 하고, 임계 이상의 충격을 받아야 방향이 바뀌니까. 나이가 들며 가진 게 많아지면(질량이 커지면) 관성도 강해지고, 변화를 위한 충격 임계점도 계속 높아지니까. 그러니 임계 이상의 충격을 주었던 그 순간 함께했던 사람들이 뇌리에 박혔으리라.
그러나 변화 계기가 생겼다고 해서 그 변화가 꼭 오랫동안 유지되는 건 아니다. 하던 대로 계속하고 싶은 마음을 비롯한 여러 마찰 때문에 멈춰버린다. 단발성 충격이 마음 깊이 새겨져서 완전히 방향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이미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좀 더 밀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작게나마 그 방향으로 꾸준히 힘을 받으면 변화가 유지된다. 그 방향으로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거나, 꾸준한 자극을 주는 사람 근처에 있을 수 있는 커뮤니티에 소속되는 등 환경을 만들어두면 변화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올해 목표 중 하나는 작년과 똑같이 “내 주변 중요한 사람들과 내가 속한 조직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영향력을 구축한다”이다. 내가 누군가의 행동 변화를 위해 시도하는 활동들에 어떤 기대치를 가져야 할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효과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관성의 법칙을 고려하여 고민해보았다.
https://excalidraw.com/ 로 그린 3가지 영향력 패턴.
- SNS, 뉴스레터, 블로그 글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작은 영향을 주는 방식이다(A). 그러나 인터넷에서 글을 읽어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는 일이 드물듯, 이런 글로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신 내 에너지는 적게 드는 게 장점이기도 하고, 또 이전에 다른 곳에서 충분한 충격을 받아 변화가 진행 중이라면 그걸 유지시켜주는 수준으로는 작동할 수도 있다.
- 1회성 코칭, 세미나, 강연은 적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인상적인 기억을 남길 순 있으나, 오랫동안 변화 유지가 될 정도의 자극을 계속 주기는 어려운 방식이다(B). 우선 청중들에게 공명이 될 만한 내용으로 코칭과 강연을 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으며 그렇게 생긴 인연을 내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사후 케어하는 것까지 가면 훨씬 힘들어진다. 그래도 청중들이 나 대신이라도 꾸준한 힘을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안내하는 정도는 신경써봐도 좋겠다.
- 다회성 코칭 후 커뮤니티 만들기는 단 몇 명에게 변화 계기가 될 정도의 큰 임팩트를 주고, 그 다음 빈도가 낮더라도 커뮤니티에서 지속적 자극을 주어 변화 유지를 돕는 방식이다(C). 대상 범위는 가장 작고, 에너지는 가장 크게 들지만, 효과는 가장 크다.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기에도(그래서 뿌듯함을 느끼고 내 방식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에도) 가장 좋다. 내게는 AC2가 이런 곳이었다. 같은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여러 차례의 1:1과 협업이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내도록 설계해볼 수도 있겠다.
에너지를 좁은 범위에 강하게 투사할수록 변화 유지가 될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수월하다. 그러나 내 에너지를 많이 들인다 해도 실질적 임팩트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러니 설계를 더 치밀하게 하고, 꾸준히 노력하고, 기대치를 낮춰야겠다. SNS 리액션, 블로그 댓글, 강연 후기 이메일 등에 일희일비하지 말자. 댓글이 없다고 변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댓글 단 분들이 꼭 변화 유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떤 영향을 줬는지, 변화가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도를 해보고, 다행히 유지되고 있다면 그저 감사하면 된다.
Appendix: 내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간단하게만 정리하려고 했는데 관련된 히스토리가 자꾸 생각나서 점점 길어졌다. 당연히 최근 기억일수록 더 생생하지만, 거의 지난 15년을 회고하는 기분으로 썼다. 이분들은 올해 연락 또는 감사인사를 남길 만한 분들이기도 하다.
내 삶의 결정적 순간에 함께 했던 분들
짧게라도 꼭 언급하고 싶은 분들
- 류성진님: AC2 멘티. 김정훈님께 도움받았던 것처럼 AC2 커뮤니티에 보답하고 싶었고, 성진님이 AC2 메일링 리스트에 도움 요청하신 걸 계기로 여러 번 만나 스터디 겸 일종의 코칭을 했다. 어쩌면 첫 피코치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아는 게 거의 없는 부족한 인간이었는데 참 용기있는 결정이었다.
- 김동우: 대학교 동기, AC2 멘티.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정보를 주는, 취향이 비슷하여 추천을 믿을 만한 친구다. 창업에 관심 있던 내게 Y Combinator를 처음 소개해줬고, 요즘도 유용하게 쓰는 1password와 얼마 전까지도 잘 사용하던 Workflowy도 동우가 소개해줬다.
- 이재호님: KCD 프론트엔드 팀 동료. Javascript였던 프론트엔드 저장소에 Typescript를 도입하셨다. 덕분에 나의 프론트엔드 기술도 한 단계 올라갔고 이후 KCD 프론트엔드 팀 채용도 유리해졌다.
- 래리(김상희님): AC2 도반, KCD 동료. 유진의 추천으로 KCD에 합류하셨다. 래리 덕분에 프론트엔드 팀 채용 프로세스가 훨씬 고도화되었고, 효과적인 면접 방법 등 여러가지 배운 게 많다.
- KCD 프론트엔드 팀원들: 직접 이 분들을 채용하고 팀 빌딩하여 리드하면서 내 역량과 커리어가 완전히 다음 단계로 전환되었다. 훌륭한 팀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자각하고, 개인보다 팀으로서 내는 임팩트가 훨씬 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 한바환님: KCD 프론트엔드 팀 빌딩 과정에서 채용 후보였던 분. 채용 프로젝트 결과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그 뒤 개인적인 연락도 몇 번 주고받았다. 결국 KCD에 합류하시진 않았지만, 바환님이 채용 프로젝트에서 선택하신 기술 스택과 그 이유를 들으면서 나도 세이프 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많은 기술적 성장이 있었다.
- 준(황준호님): KCD 동료. KCD에 계시는 동안 투자에 대한 세미나를 몇 번 열어주셨다. 준 덕분에 자본소득에 대한 개념이 많이 잡혔다. 삶에 대한 관점에서도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분이다.
- 홍영기님: AC2 도반. 아직도 실제로는 한번도 못 만났지만, 2021년 말 AC2 커뮤니티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배운 것들 중 영기님께 배운 OKR이 특히 유용했다. OKR을 변주하여 XL8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목표설정 프레임워크로 잘 써먹고 있다.
- Huberman: 작년부터 나의 건강 지식을 책임져준 신경과학자 유튜버. 운동하면서 듣기 딱 좋은 발성을 가졌다. 올해는 휴버맨이 신체 및 정신건강을 위해 추천하는 루틴을 따르며 건강 관리를 하고 있다. 감사함의 의미를 담아 Premium 구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