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얼마 전 두 돌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는 4살. 옹알옹알 말하면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졌고, 내 개인 시간이 줄어드니 나를 위한 시간도 너무나 소중해졌다. 그래서 요즘 내 삶에서는 시간과 에너지가 무척 소중한 재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할 때,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ROI를 기준으로 의사결정하고 행동하는 게 많아졌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나에게 ROI가 무슨 의미인지 깊게 고민해보지는 않았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이다.
- 여러 선택지 중 내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가치있게 쓰는 선택은 무엇일까?
- 더 적은 시간과 에너지로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는 나만의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것은 ROI가 굉장히 높은 행위일테니 정리하는 데 기꺼이 시간을 써본다.
우선 ‘가치’있는 선택을 하려면 나에게 가치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일을 가치있게 여기는지 정의내려야 한다. 사실 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두었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떨 때 행복한가?
보람찬 일, 그렇지 않은 일
나는 보람차거나 재미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그리고 내게 어떤 일이 보람찬가 여부는 도메인, 피드백, 그리고 일을 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나는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며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을, 내 역량을 충분히 살려 효과적으로 수행할 때 보람을 느낀다. 반대로, 이럴 때는 시간과 에너지를 헛되이 쓴다는 느낌이 들어 동기가 줄어든다.
- 내가 하는 일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들에게 딱히 도움이 안 되거나,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을 때(Dark Pattern). 예를 들어 공포에 기반한 마케팅이나 구독 해지를 귀찮게 하는 행위는, 제품의 거시적 지표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좋아지더라도 하고 싶지 않다.
- 내가 만든 제품의 사용자로부터 피드백을 받기 어려운 환경일 때. 그러한 이유를 분석해서(제품의 효용이 충분하지 않아서, 많은 사용자에게 도달하지 못해서, 피드백을 남기기 어려워서, 피드백이 있지만 전달이 안돼서 등) 해결하는 건 재밌으나, 환경 개선 자체도 쉽지 않으면 의욕이 확실히 떨어진다.
- 권한 및 자율성을 충분히 부여받지 못하거나, 규제 따위로 인해 자유롭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하기 어려울 때. 이런 상황에서는 환경 개선도 어렵기 때문에 더 싫다. 이는 내가 스타트업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금융 도메인에서 빠져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은 여러 규제 때문에 문제를 풀기가 너무 어려우니 풀었을 때 사용자에게 큰 가치를 주는 건 확실한데 그 과정이 내게 너무 괴롭다.
학습과 성장에서 오는 재미
보람찬 일은 그 자체로 뿌듯하지만 내가 어떨 때 재미있는가, 라고 하면 답이 좀 달라진다. 나는 학습하고 성장할 때 재미있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나는 사고관이 확장되는 지혜를 얻거나, 이전보다 훨씬 더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크게 성장했음을 느끼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재미를 느낀다. 이 생각을 ‘지혜의 습득’과 ‘기술의 숙달’ 두 갈래로 풀어볼 수 있다.
지혜의 습득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많이 배운다고 내게 재미있는 공부가 되지는 않는다. 보람찬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공부를 할 때 기분이 좋다. 이런 공부를 통해 잔가지나 나뭇잎이 아닌 나무 밑둥이나 뿌리에 가까운, 근본적인 이해를 얻으면 머릿속이 확 밝아지는 이미지와 함께 희열을 느낀다. 가지를 잡으면 나뭇잎들이 딸려오는 것처럼, 오의를 깨달으면 작은 지식이나 실천법은 패턴화되어 습득하기 수월해진다. 이런 근본 패턴은 다른 분야로 학습이 비교적 쉽게 전이되어, 다른 패턴과 시너지를 일으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낸다. 특히 ‘가지를 잘 찾아서 잘 붙잡는 방법’과 같은 메타 패턴, 즉 패턴에 대한 패턴은 그 효과가 훨씬 크다(e.g., 학습법에 대한 학습, 전문가에게 효과적으로 배우는 인터뷰 방법).
이런 패턴 전이는 내가 한때 심하게 빠져 살았던 무협소설에서 처음 인지하게 됐다. 무협소설에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개념이 흔하게 나온다. 모든 물줄기가 결국 바다에 가서 하나가 된다는 말이고, 정파 고수와 사파 고수가 각각 극에 이르르면 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유사해진다는 식으로 쓰인다. 현실 세계에서도 각 전문 분야의 대가들이 얘기하는 핵심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스타트업 문화/대학원 연구/육아/글쓰기/애자일과 같은 여러가지 분야에서 설계 철학, 성공을 위한 베스트 프랙티스, 실패의 신호 등 유사한 패턴이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무척 재미있고, 그런 깨달음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가족 규칙과 회사 문화의 공통점, 전문성, 패턴, 재귀, 언행일치).
애자일 방법론의 대가 중 한명인 켄트 벡은 <테스트 주도 개발>에서 "TDD의 핵심은 의사결정과 피드백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간극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에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김창준님 강재영님의 애자일 팟캐스트에서 들은 말이고, TDD 책을 다시 훑어봐도 이 말을 찾기 어렵긴 했지만.. 아무튼) 큰 울림과 깨달음이 있는 말이었다. TDD를 이렇게 생각하면 그 패턴을 개발뿐 아니라 개발 외의 업무나 일상생활에도 적용하여 훨씬 효율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겠더라. 2021년 말부터 AC2 커뮤니티에 다시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메타 패턴을 많이 배우고 있어 참 즐겁다. (Coming up - [AC2 Patch] 일상에서의 TDD 워크숍 핵심 정리)
기술의 숙달
내가 자주 하는 작업이나, 이전에 해봤던 작업과 유사한 일을 할 때 전보다 유의미한 수준으로 더 ‘잘’ 하게 됐다는 걸 느끼면 기분이 좋다. 그러면 특정 분야에서 무언가를 더 잘 하게 됐다, 또는 기술이 더 숙달되었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기술이란 곧 문제 해결 수단이므로, ‘기술이 숙달됨’이란 곧 ‘문제 인식/정의/해결을 더 잘 하게 됨’이다. 이 3가지는 내가 생각하는 탁월한 개발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Coming up - 탁월한 개발자를 알아보기, 그들로부터 배우기)
- 문제 인식을 잘 한다 → 다른 이들은 문제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개선 가능성을 찾는다.
- 문제 정의를 잘 한다 → 문제 상황과 원인을 다양한 층위와 관점에서 바라보고, 여러가지 패턴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문제를 훨씬 더 단순한, 더 효과적인, 더 근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쪼갠다.
- 문제 해결을 잘 한다 → 문제의 해결책을 여러 방향에서 떠올리고, 각 해결책의 트레이드오프를 이해하여, 현재 상황에 맞게 선택한다. 이 의사결정을 어떤 시점에 어떤 신호를 보고 바꿀지 알고 있다. 그리고 작은 단위로, 더 일찍, 더 빈번하게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법을 적용한다. 결과적으로, 더 빠르고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내가 웹개발에 숙달된 과정을 위 프레임으로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상상한 모양이 브라우저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웹개발에 익숙해지면서 단순히 페이지 띄우면 끝이 아니고 사용자들이 내 제품을 써주어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웹페이지가 빨리 떠야 사용자가 이탈하지 않으며, 이 로딩 시간에는 내가 사용하는 라이브러리들의 크기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점차 경험이 쌓이면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패턴도 다양해진다.
- 무거운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 라이브러리 선택시 크기가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되고, 라이브러리 크기를 개발 단계에서부터 인지할 수 있는 IDE 확장 도구를 사용하고, 때론 라이브러리 대신 작은 버전으로 직접 구현한다.
- 무거운 라이브러리의 영향이 덜 가게 하자 → 무거운 라이브러리를 서버에 둔 채 연산 결과만 받아오거나, 큰 번들을 쪼개서 로드하거나, 여러 레이어에서 캐시를 공격적으로 사용한다.
- 번들 크기를 주기적으로 관리하자 → 번들 크기 분석 도구를 사용하고, 성능 예산을 세워 주기적으로 측정한다.
- 결국 중요한 건 사용자가 인지하는 성능이다 → 로딩 단계에서 스피너 대신 스켈레톤 UI/애니메이션을 도입하고, 서버가 응답을 아직 안 줬어도 UI를 먼저 업데이트한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새로운 해결법을 받아들이고, 각 해결법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적용할 때마다 점점 더 나의 기술 역량이 향상되는 걸 느껴 즐겁다.
가족에 대한 감정적, 물질적 지원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보람차고 재미있는지는 비교적 쉬웠는데, ‘내 가족이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행복해질까?’ 는 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 가족이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로 조금 질문을 바꿔보니, ‘가족에게 감정적/물질적 지원을 충분하게 해주는 것’으로 답할 수 있었다.
감정적 지원은 우리 가족에게 건강과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를 위한 수단임을 꾸준히 되새겨, 나도 그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하고 가족도 그런 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지원과 직접 연결되는데, 물질적 지원은 가족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시간을 절약해 본인이 행복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돈을 아끼지 않으려면 돈을 잘 벌어야 할텐데, 아직 이건 부족하다. 별 생각 없이 좋다는 건 다 할 정도로 부자도 아닐 뿐더러, ‘돈은 시간을 사기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 외에는 돈에 대한 나만의 프레임워크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승호의 <돈의 속성>에서 본 ‘부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4가지 능력’이라는 분류가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되었다(사실 책을 소개받은 뒤 읽지는 않고 키워드만 가져왔다).
- 돈 버는 능력(노동소득): 내 시간으로 돈을 버는 효율은 꽤 좋아졌다. 노동시장에서 개발자 몸값이 올라감에 따라 내 연봉 자체도 올라갔을 뿐 아니라, 좋은 개발자를 뽑고 교육하는 주변 시장(소프트웨어 교육, 주니어 개발자 멘토링, 스타트업 컨설팅 등)에서도 더 많은 돈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쪽으로 컨설팅과 멘토링을 몇 번 해보니 내 한정된 개인 시간의 단가를 최소 시간당 20만원으로는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가치를 크게 느낄 수 있다면 단가는 좀 줄어도 된다. 2022년 1월에 참여한 주니어 개발자 멘토링은 단가는 크지 않았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근데 내 시간을 엄청 많이 쓰는데 비해, 아직 초기 서비스라서일 수도 있겠으나 이력서 한번 보고 피드백을 남기는 구조가 1회적이고 일방적이라서 멘티들에게 실질적 변화를 오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주니어들이 본인 이력서를 스스로 개선할 수 있게 돕는 글을 한 편 쓰고, 내가 직접 주니어 개발자 그룹 코칭을 하는 게 내게 돈과 가치 모두 더 많이 가져다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oming up - 주니어 개발자 이력서에서 보이는 공통 패턴을 개선해보자)
- 돈 모으는 능력(자본소득): 내 돈으로 돈을 버는 효율은 아직 좋지 않다. 2020년부터 이것저것 조그맣게 투자는 해왔지만 성과는 나쁜 편이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아예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는데, 위임할 전문가를 찾자니 결국 공부가 필요하더라. 그래서 2021년 말에 자산 운용 전문가를 구하는 여정을 시작했고, 1월에 1차로 마무리했다. 올해는 이렇게 위임하여 천천히 학습하면서,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직무에 집중할 예정이다.
- 유지하는 능력(절약): 서울사랑상품권, 상생소비지원금 등 확실한 현금성 보상이 주어지는 제도에는 열심히 참여한다. 실손보험이나 연금형 IRP를 챙기고, 아내가 앱테크를 조금씩 하면서 생필품 구매를 비롯한 일상에서의 소비를 좀 더 싼 가격에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것 외에는 철저하게 절약하고 있진 않다. 우리 가족의 소비욕이 아직 크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아끼는 부분이 꽤 있을 듯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만족하고, 나머지는 아내가 잘 해주리라 믿어보자.
- 쓰는 능력(재투자): 위에서 생각한 ‘물질적 지원’이 결국 이 부분이다. 돈을 벌었으니 다시 잘 써서 시간과 건강과 행복을 사야 할텐데, 아직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들이 피상적인 수준이다. 나의 시간당 단가를 20만원으로 잡았으니, 거꾸로 시간당 20만원 미만의 돈을 들여 현재/미래의 1시간 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생각 정도. 그래서 최근에 삶의 질을 높여주는 지름 글 쓰면서 정리해보고 더 과감하게 ‘지르기’ 시작했는데, 더 창의적/효율적으로 돈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언을 듣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자산 운용 전문가에게 수수료 내는 것도 창의적으로 돈 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약
요즘 나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ROI를 기준으로 의사결정하고 행동한다. 더 좋은 의사결정을 하려면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 나는 보람차거나 재미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내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을, 내 역량을 충분히 살려 효과적/생산적으로 수행할 때 보람을 느낀다.
- 사고관이 확장되는 지혜를 얻거나, 이전보다 훨씬 더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크게 성장했음을 느끼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재미를 느낀다.
- 나는 감정적/물질적 지원을 통해 내 가족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돕고 싶다.
- 감정적 지원은 나에게(우리에게) 건강과 행복이 중요한 가치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를 위한 도구임을 꾸준히 되새겨, 나도 그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하고 가족도 그런 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 물질적 지원은 가족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시간을 절약해 본인이 행복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 이를 위해 돈을 벌고, 모으고, 유지하고, 쓰는 네 가지 능력을 더 키운다.
따라서 어떤 일이 내게 보람차거나, 재미있거나, 가족에게 감정적/물질적 지원을 해줄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러한 선택지들 중 가치가 높은 것들을 골라내는 방법을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