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나의 모교인 한국과학영재학교의 창립 20주년이다. 지난 5월 20일, 20주년을 맞아 영재고 1기들의 홈커밍이 있었고 나도 연사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부산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게 무척 피곤하긴 했으나 학교에서 20년간 그대로였던 것들과 바뀐 것들을 보며, 오랜만에 동기들과 선생님들을 뵈며, 나에게도 이런게 있었나 싶었던 애교심도 되살아나고 아주 재미있었다. 연사들의 발표도 훌륭했는데 동기들이 많이 참여하진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준비하느라 고생하신 집행부 교직원 분들과 집행위원 친구들에게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발표는 꽤 열심히 준비했는데, 연습할 때는 25분 딱 맞췄었지만 막상 실제 발표를 해보니 고등학교 시절 추억도 얘기하게 되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지더라. 준비했던 슬라이드에서 거진 10장은 발표를 못 했다. 준비했던 시간이 아까워 슬라이드 일부와 함께 이렇게 글로 옮겨둔다.
소개
안녕하세요. 20년 전에 이 학교 강당에서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타겠다’고 외쳤고, 지금은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배휘동입니다.
제 소개부터 간단히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정체성이 참 다양하게 있죠. 저는 보통 3가지 정체성으로 저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정체성 1: 가족
우선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이자 다섯살 된 귀여운 딸아이의 아빠입니다.
정체성 2: 하는 일
XL8이라는 미디어 번역에 특화된 인공지능 스타트업에서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ChatGPT 덕분에 일반 대중에게도 AI의 강력함이 많이 알려졌는데요. AI에는 학습할 데이터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데이터의 질도 중요합니다. XL8같은 작은 스타트업이 대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이유도, 사람 번역가가 직접 작업한 고품질 자막 데이터를 XL8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정체성 3: 취미
제게는 취미가 세 개 있습니다. 첫번째는 글쓰기인데요. 블로그도 재밌게 하고 있고, 블로그에 쓴 글 중 일부를 뉴스레터로 발행하기도 합니다. 올해는 블로그에 글 50개 쓰는 게 목표였는데 5월 말인 지금까지 18개밖에 못 썼네요. 조금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두번째 취미는 보드게임입니다. 최근에 보드게임을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고요. (사진) 여기 네 명이 다 고등학교 동기들인데 이제 다들 결혼하고 애기 낳고 해서 1년에 몇 번 못 만나긴 하지만, 같이 보드게임 하면 시간이 살살 녹아요. 제 딸하고도 몇년 안에 진지하게, 봐주지 않고 보드게임을 즐기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기면 화내거든요.
세번째 취미가 즉흥연기입니다. 즉흥연기를 주제로도 글 하나 썼고요. 즉흥연기는 대본 없이 포맷만 가지고, 관객들에게 제시어를 받아서 즉흥적으로 보여드리는 코미디 공연입니다. 아기 키우면서 연습을 자주는 못하게는 됐지만 이걸 배우고 실행하면서 제 삶이 무척 다채로워졌죠.
발표 목적
제 소개는 충분히 했으니, 제가 이 발표를 어떤 목적으로 하는지 얘기해보겠습니다.
이 행사의 목적이 후배들에게 다양한 진로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다양성'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키워드입니다. 어떤 사건이든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해결방안을 떠올릴 수 있으면 삶이 더 유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까 제 소개도 일부러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고요.
저는 다양성의 한 하위 범주가 상호성이라고 봅니다. 이 발표 또한 연사인 저와 참여자인 후배들 모두에게 이득이 되길 바랍니다.
제게는 이 발표가, 제 삶의 다양한 변곡점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랐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제가 어떤 결정적 순간들을 경험했고, 어떤 의사결정을 왜 했고, 그게 이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같은 것들이죠. 그래서 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통찰을 얻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발표를 듣는 분들은 저의 이야기로부터 간접경험을 해서 다양성을 함양하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는, '내 커리어와 삶에도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발표는 아주 짧은 자서전처럼 구성해봤습니다. 총 5챕터로 이루어진 자서전입니다. 단, 여기에 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의 왜곡과 미화가 엄청나게 섞여있을 수 있고, 또 시간 관계상 단순하게 요약만 한 부분도 많으니까 적당히 걸러서 들어주세요.
챕터 1: 고등학교 졸업 (~2005)
제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볼게요.
과학경시대회 열심히 해서 영재학교에 1기로 입학했습니다.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강당에 1학년들이 모여서 입학 포부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의 자기 계획을 발표하는 무서운 자리가 있었어요.
저도 제가 가졌던 꿈을 당당히 얘기했죠. "‘KAIST에 가서 훌륭한 이론물리학자가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겠다."
그런데 사실 이 때는 왜 과학자가 되고 싶은지, 훌륭한 이론물리학자는 어떤 사람인지, 왜 노벨상을 타고 싶은지, 타고 나서는 무얼 하고 싶은지… 같은 고민은 아예 한 적이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KAIST는 카이스트 드라마 보고 생각했던 것 같고 이론물리학자는 <엘러건트 유니버스> 읽고 뭔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 멋있다, 라고 감동받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튼 입학해서 첫 1년은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영어 원서는 참 읽기 어려웠고, 천재같은 친구들도 너무 많았지만요. 그런데 이론물리학을 하려면 미분방정식이랑 선형대수학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했다는 걸 제가 몰랐거든요? 이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고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노는 것의 재미를 느껴버렸다는 거예요. 무선인터넷 되는 노트북 받았고, 부모님의 눈은 멀리 있고, 공부는 잘 안되고.. 그냥 놀아버렸던거죠. 포커도 치고 마작도 치고 게임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판타지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험기간에만 후회하고 다시 노는 게 반복됐어요. 학점은 당연히 바닥이었고요. 부모님은 얘가 졸업이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하시고, 어떤 선생님으로부터는 진지하게 인문계 전학가는 게 어떠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주요 사건 및 의사결정
- 졸업 포기 않고 KAIST 응시, 합격
- 3학년 때 수강한 프로그래밍 수업들
의사결정 요인 및 계기
- 1기니까 외부 시선 때문에라도 좋은 대학에 다 붙여주지 않을까? + 용기 부족
- 미적분을 쓰지 않는 학문이 뭐가 있을까? 1학년 때 프로그래밍 수업 재밌었는데…
그래도 제가 졸업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영재학교 1기인데, 대학은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냥 다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신기하게 카이스트에 합격도 했고요.
이때를 돌이켜보면, 3학년 때 프로그래밍 수업 몇 개를 들어본 게 저에게 아주 중요했어요. 이게 있으니 그나마 대학교 때 전산학 전공을 할 생각을 한 거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지금 개발자로 살고 있으니까요.
프로그래밍 수업 들은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1학년 때 처음 배웠던 프로그래밍이 무척 재미있었고, 또 프로그래밍은 미적분을 안 쓰지 않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거든요.
이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준 것들
- 동기들과의 관계
- 영어(교과서)에 익숙해짐
- 다양한 게임, 서브컬처를 이해하고 즐김
커리어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것들
- 동기들과의 관계
- 고등학교 학점
그리고, 그럴줄은 몰랐지만 이후의 제 삶과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들이 몇 개 있는데 하나는 동기들과의 관계예요. 솔직히 저는 고등학교 이전 친구들 중 졸업 이후 친교를 나눴던 친구가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친구들은 수도없이 만났고, 같이 놀기도 많이 놀았고, 제 역량과 커리어에도 큰 영향을 받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때 누구와 얼마나 친했냐’는 별로 중요하진 않더군요. 물론 고등학교 때 절친들과 특히 오래 가긴 하지만, 예전에 데면데면했던 친구도 어쨌든 나중에 만나면 다들 반갑게 인사하고, 추억 나누고, 적당히 협업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도 있고요.
고등학교 때 학점 말아먹은 건… 카이스트 입학 실패했다면 모르겠는데 아무튼 대학 입학 이후로는 한번도 필요했던 적이 없었네요. 반면 영어는 이후 주구장창 쓰게 됐었는데 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원서로 공부한 덕분에 나중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적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게임, 소설, 만화 같은 것들에 빠져서 학점을 말아먹긴 했지만 이건 제 삶의 큰 부분이 되기도 했어요. 건강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데 스트레스를 줄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것도 중요한데 저는 지금 보드게임이 취미잖아요. 어찌보면 빠르게 다양하게 간접경험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또 이걸 매개로 친교를 맺는 일도 많죠. 애들은 게임하면서 친해지니까요. 그리고 판타지소설은 제 삶에 거대한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했어요. 이건 좀 있다 다시 얘기해볼게요.
챕터 2: 입학, 입대, 제대 (~2009)
제가 잘해서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바닥을 찍었던 자존감이 대학에 들어간 걸로 조금 회복됐었는데요. 이것도 잠시뿐이었어요.
이미 심각한 판타지소설 중독에 빠져있었거든요. 대충 세어본 적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군입대하기 전까지 한 1만권 정도는 읽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와 똑같이 시험 때마다 후회하고, 부모님께 혼나고, 약속하고, 다시 노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1학년 때 평점이 1.75였고요.
나는 안될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생 처음 담배 피워보고, 아파트 옥상에도 꽤 자주 올라가서 뛰어내리면 어떨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1학년이 끝날 무렵에, 아버지가 너 그럴거면 학교 때려치고 군대나 가라고 하셨어요. 저도 차라리 그래야겠다 싶어서 ‘즉시 자원입대’ 같은 것도 찾아보고 있었고요. 그런데 어머니가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마지막으로 카투사라는 걸 지원해보라고 하시더군요. 마침 토익 점수가 있어서 지원했는데 6:1 확률을 뚫고 합격했어요. 진짜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훈련소에 입소해서 육체가 구속당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이 해방됐어요. 인터넷이 안 되니까 소설을 못 읽었는데, 그러니까 제 내면에 집중하게 된거죠. 3년 반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때는 항상 군복에 작은 메모장과 펜을 넣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걸 다 적었어요. 카투사다 보니 개인 시간이 많은 편이어서 공부도 엄청 많이 했죠. 군대 있는 동안 쳤던 토익 시험 성적이 좋았던 것도 자존감 회복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보다는 철학과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성숙해지고 삶의 목표를 찾은 게 더 컸어요.
이건 군 시절 했던 메모 중 일부인데요. 참 두서없이 별 얘기가 다 들어있죠. 재밌는건 노벨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됐던 거예요. 원래 노벨상이 인생 목표였는데 말이에요.
이 시기를 요약해보면, 역시 카투사 입대가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카이스트에서 대학원 통해서 군대 해결할거라고 했었는데 저는 대학원은커녕 제적당하지 않을까 두려웠거든요. 운좋게 카투사에 가서 영어도 많이 쓰고 공부도 많이 하면서 그뒤로 삶이 제법 잘 풀렸죠.
그런데 군대 가서 제가 공부한 자료는 거의 강유원이라는 철학자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거거든요. 이 철학자를 어떻게 알게 됐냐면,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망쳤던 판타지 소설이 계기였습니다. 제가 즐겨 읽던 박인주라는 소설가의 블로그에 가보니까 그 블로그 대문에 강유원씨가 쓴 글귀가 있었어요.
그걸 보고 강유원을 검색해보니 홈페이지가 있었고, 거기에 사회학과 철학을 비롯한 여러 강의가 올라와있었고, 그중에는 이강룡이라는 분이 EBS에서 글쓰기 강의했던 음성파일도 있었습니다. 그걸 들으면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강룡님 홈페이지에 제가 쓴 글을 올려서 첨삭 요청도 해보고 그랬어요. 한글 맞춤법 공부도 하고, 무작위로 정한 주제 두 개를 연결해서 글 한 문단 써보는 연습도 해보고, 별걸 다 했었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메모 많이 하고, 생각 많이 하면서 삶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좀 진부할 수도 있지만 제 인생 목표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외출하고 휴가나올 때마다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나눴고요. 얘가 갑자기 너무 진지해졌다며 몸서리치는 친구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노스모크라는, 한국 최초의 위키를 알게 됐는데, 이 위키에서 한국 애자일 개발문화의 선구자인 김창준님을 알게 됐어요. 지금은 "함께 자라기"라는 책으로 이 분을 알고 있는 후배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창준님의 블로그 글이 너무 좋아서 완전 팬이었거든요. 그런데 창준님이 스크래치라고, 아이들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 관련 행사를 블로그에서 소개하시더라고요. 본인도 연사로 참여한다고.
이분 얼굴이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팬심에 제가 군대 말년휴가때 이 행사에 갔습니다. 정확히는 말년휴가를 이 행사에 맞춰서 냈어요. 그리고 이 행사에서 만났던 분들이 다들 반짝반짝 멋져 보였고, 이게 제가 제대 후 전산학과에 가는 걸로 진로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소프트웨어로 세상을 좋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준 것들
- 김창준 → AC2
- 메모 습관과 글쓰기 연습
- 나와 많이 달랐던 집단들에 대한 이해
- 영어 듣기/말하기의 두려움이 사라짐
커리어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것들
- 동기 및 선후임과의 관계
- 철학, 사회학, 경제학의 여러 개념들
- 높은 토익 점수
이 다음 시기에 창준님이 만든 AC2라는 교육과정에 참여했는데 이게 제 커리어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다음 챕터에서 자세히 얘기할게요.
군대에서 시작한 메모와 글쓰기는 제 이후 커리어에서도 계속 사용됐습니다. 제 강점이자 정체성이 된 거죠. 그리고 군대라는 곳이 워낙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이고, 특히 저는 미군들과도 있다 보니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저는 중학교때까지는 공부만 했고, 고등학교때부터는 아싸처럼 게임하고 소설만 봤기 때문에 어찌보면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났거든요. 군대에서 다양성을 경험하면서 제 안에 있던 편협함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듣고 말하는 게 더이상 두렵지 않게 된 것도 이후 큰 도움이 됐고요.
그런데 군대에서의 인연은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적어도 제 커리어에서는 별 영향이 없었어요. 지금도 가끔 통화하는 분도 있고, 만나면 반갑게 얘기 나눌 것 같긴 한데, 좀 더 적극적으로 인연을 이어나갈걸 그랬다는 아쉬움은 좀 있네요. 그리고 이 때 책으로 공부했던 건 제 무의식의 자양분은 되었겠지만 대부분 그냥 지식 자체만 탐독했지 현실에 적용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금새 기억에서 사라졌던 것 같아요. 토익 점수도 자존감은 높여주었을지언정 이후 써먹은 적은 없었습니다.
챕터 3: 복학, 연애, 대학원, 자퇴 (~2013)
복학해서는 계획했던 대로 전산학과로 등록했습니다.
이 즈음에 OLPC라는, MIT 미디어 랩에서 주장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100달러 이하의 가격으로 만든 컴퓨터를 제공하자는 프로젝트 얘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여기에 꽂혀버렸어요.
앞에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걸로 제 인생 목표를 잡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건 아주 많겠죠.
저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생기려면 사람들이 아는 게 늘어나고, 할 수 있는 게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OLPC를 보면서 저에게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당연했지만 아닌 사람들도 많다는 걸 새삼 깨닫고 놀랐죠.
그렇다면 내가 전산학을 공부해서, 좋은 컴퓨터를 싸게 공급하고, 컴퓨터와 인터넷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그럼으로써 그 사람들이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면, 삶의 질이 올라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학생 버프도 있고, 이런 생각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수업 듣는 태도가 다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성적이 확 좋아지고 자존감도 높아졌습니다.
한편, 4학년이 됐는데 아직도 봉사활동 시간을 많이 안 채웠던 터라, 한방에 시간을 크게 채울 수 있는 농촌 봉사활동에 갔습니다. 무려 8박 9일 짜리였거든요.
농사일은커녕 시골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던 저에게 이 시간은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의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주제에, 정작 우리나라에서 소득이 낮은 집단에 속하는 농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전혀 몰랐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은 제 목표의 허점을 제대로 느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는 좋은 컴퓨터를 제공하면 컴퓨터/인터넷 접근성이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접근성이 올라가면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하지 않더라고요. 그 사이에 굉장히 넓은 갭이 있었습니다.
농촌이라도, 제가 가봤던 집에 컴퓨터가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6~70대의 나이에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하고 쓰러져 자는 농민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시간도 이유도 없었을 뿐이었죠. 그러니까 컴퓨터를 더 잘 쓰려고 배울 필요도 거의 없고, 웹이니 소셜이니 하는 건 먼 나라 이야기였어요.
싸고 좋은 컴퓨터를 만들어서 제공한다 한들 사람들이 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겨우 알게 된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세탁기는 막 세 대씩 있고 그런 집도 있었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가장 쉽고 티 나는 지원이 이런 물품 지원이니까, 어디 단체라던가 기업에서 자꾸 나눠줬다고 하더라고요. 컴퓨터도 그렇게 받은 집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그들의 삶에 실질적 변화가 생겼느냐 하는 건 측정하기도 어려우니, 크게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겠죠.
실제로 OLPC 프로젝트도, 예를 들어 ‘그걸 줬더니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고 교사도 부족하고 전기도 부족하고 아무튼 다 부족해서 대부분은 아이들이 게임만 하더라’ 같은 뉴스도 나중에 보게 됐었어요. ‘역시 세상은 단순하지 않구나. 사용자가 쓰지 않는 기술에는 가치가 없고, 쉽게 쓰고 잘 쓰게 만드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하는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었죠.
이 깨달음을 풀어낼 계기가 있었어요. 4학년 2학기에 비판적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요. 이 수업에서 제 글에 대한 칭찬을 정말 많이 받아서 제 글쓰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도 확 붙었어요.
그리고 이 당시 학교에서 한글날 기념 과학 글쓰기 대회가 열렸고, 모든 종류의 논술 또는 글쓰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강제 참가였죠. 저는 제 삶의 목표와 농활에서 깨달은 점에 대해 수필을 썼고 좋은 평가를 받아 책에도 실리게 됐어요. 사실 제가 오늘 여기까지 했던 얘기가 이 수필의 내용과 많이 겹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졸업을 해야 하는데, 카이스트에서는 졸업하려면 졸업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저는 당시 컴퓨터 운영체제 수업을 가르치시던 인기 교수님의 랩에서 졸업연구를 했습니다.
제가 3학년 여름방학 때 LG전자에서 인턴을 했는데, 제가 일하던 곳이랑 이 교수님의 연구실이랑 같이 연구를 하던 게 있었나봐요. 교수님이 LG전자에 방문하셔서 회사 분들이 저를 소개해주셨는데, 제가 마침 3학년 가을학기에 운영체제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거든요. 그 말씀을 드리니까 교수님이 그러면 저를 기억하겠다고, '이름하고 전화번호, 이메일 좀 줄래요?'라고 하셨어요.
교수님이 기억하겠다고 하시니 완전 쫄리잖아요. 그래서 운영체제 수업을 엄청나게 열심히 들었고, 실제로 수업도 재밌고 하니까 거기서 연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거기서 졸업 연구도 하고, 대학원 진학 후 연구실도 여기로 정했죠.
그런데 연구실에 가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복학해서 아직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았던 제게 한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와서는 “창업동아리를 만들었는데 믿을 만한 친구가 필요하다, 네가 제대하는 것만 기다렸다”며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그때는 창업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자존감을 채워주는 그 말에 홀려서 같이 했습니다.
아주 좋은 선택이었죠. 덕분에 제 미래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민하게 됐고, 또 웹개발도 시작했으니까요.
한편, 저는 글쓰기를 좋아했고, 연구실 선배들이 논문 쓰는 걸 돕는 것도 재밌었지만 제 연구를 한다는 건 또 완전 다른 얘기더군요.
역량이 성장하려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피드백을, 자주 받는 게 중요한데요.
당시에는 제가 대학원생으로서, 나아가 연구원으로서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피드백이 학회에 논문이 억셉됐냐 아니냐 밖에 없다고 느껴졌어요.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짧아도 3개월, 길면 6개월이나 연 단위로 오는 피드백이었고요.
그에 반해 연구용 앱을 만들어서 실헙 데이터를 수집하고, 창업동아리를 계기로 웹사이트 개발해서 사용자 반응 보고 이런 건 피드백이 상대적으로 훨씬 자주 오니까 훨씬 재밌더군요. 그래서 연구보다는 개발자가 내게 더 흥미로운 길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결국 창업휴학을 해서 짧게 시도를 해보다가, 아예 대학원 자퇴를 했어요.
자퇴하기 전에 있었던 큰 사건은 앞서 언급했던 김창준님의 AC2 교육입니다. 이게 상당히 비싼데, 당시 3개월 과정에 300만원 좀 넘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400만원 가까이 하고요.
대학원 연구실 월급을 모아서 등록하고, 4번 열리는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대전과 서울을 계속 왔다갔다 해야 하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원래는 코딩에 자신감이 부족해서 여기 가면 코딩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정도였는데 막상 코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하나도 없었고요.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조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더 잘 대하고, 더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웠죠.
3개월동안 이뤄진 변화도 컸지만 그보다는, 이 교육과정을 들은 사람은 모두 AC2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는데, 거기서 만난 인연들이 이후 제 커리어를 만들어주었습니다.
AC2에는 코칭과 멘토링 제도가 있어요. 10년도 전에 제 멘토셨던 두 분하고는 요즘도 자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 분하고는 매주 전화로 상호 코칭을 하고요. 다른 분하고는 즉흥연기를 같이 하고 있죠.
주요 사건 및 의사결정
- LG전자 인턴, 교수님 만남
- 창업동아리에서 웹개발 시작
- 농활에서 아내 만남, 연합동아리 가입
- 4학년 때 들었던 '비판적 글쓰기' 수업
- 대학원 월급 모아서 AC2 참여
의사결정 요인 및 계기
- “이름하고 전화번호, 이메일 좀 줄래요?”
- "너 제대하는 것만 기다렸어"
- "다른 대학생들 모인 마을로 가실 분?"
- "우리 동아리는 타대생도 들어올 수 있어"
이 시기에 저에게 굵직한 변화가 정말 많이 생겼네요. 인턴해서 교수님 만나고, 창업동아리에서 웹개발도 시작했고요.
그리고 챕터의 제목에 ‘연애’가 있는데 왜 얘기를 안 하나 생각하신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사실 농활에서는 제 지금의 아내도 만났어요. 이 때 결정적 순간이 있었는데, 카이스트에서 참여하는 학생이 많아서 농활을 두 마을로 나눠서 간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한 마을은 카이스트 학생들 위주로 가고, 다른 마을은 다른 대학 학생들하고 모이는 마을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새로운 기회가 끌려서, 타대생들 많이 만나고 싶어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고, 경쟁률이 높을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다들 자기들끼리 가는 걸 선택해서 편해졌죠.
그 마을에서 아내를 만나고, 대화가 정말 잘 통해서 농활에서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다 보니 자기는 충남대학교의 동아리에 속해 있는데 거기에 타대생도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단박에 저도 가겠다고 했죠. 거기서 연애도 하게 됐고요.
그 동아리는 인문사회과학에 관련된 책을 함께 읽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곳이었는데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듣고, 나누면서 제가 더 성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쓰기 수업과 AC2, 둘 다 제게는 아주 큰 사건들이었고요.
이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준 것들
- 대학원 동기들과의 관계
- AC2 커뮤니티 사람들과의 관계
- 논문 읽기에 익숙해짐
- 바닥부터 나를 위한 웹사이트 만든 경험
커리어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것들
- 연구실 동료들과의 관계
- 대학교 학점과 대학원 학점
- 대학원 연구 주제
제가 비록 대학원은 자퇴했지만, 그래서 학계와 멀어져서인지 이후 연구실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리 긴밀하게 이어지진 않았어요. 아쉬운 일이죠.
그런데 대학원에서 만났던 동기들은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제 첫 직장의 CTO와 두번째 직장의 CEO가 대학원 동기였거든요. 제가 대학원에서 맨날 앞자리 앉아서 열심히 수업 듣고 질문하고 발표하고 했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학점과 대학원의 연구 주제는 제 이후 커리어에 영향은 딱히 안 줬습니다. 반면 논문 읽기에 익숙해진 건 제가 이후 근거와 실험으로 검증된 지식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해주는 기초가 되었어요.
창업동아리에서 나를 위한 웹사이트를 바닥부터 삽질해가며 만들었던 경험도 제 역량의 근간이 되었고요.
챕터 4: 창업, 게임개발, 취업, 이직 (~2017)
자퇴까지 하고 시작한 제 창업은 얼마나 오랫동안 했을까요. 답은 고작 1년입니다.
뭐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오늘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네요. 다른 할 얘기가 많아서.
여기서 왼쪽은 창업 당시 서브 목표였던 '매일 웹사이트를 배포한다'를 실천하면서 매일 인증 사진을 찍은 것이었고요. 오른쪽은 베타테스트하면서 피드백 받은 것을 그날 바로 반영해서 알려드렸더니 또 답메일을 주셔서, 그게 너무 기뻐서 스크린샷을 찍어놨던 거예요.
아무튼 재미는 엄청 있었어요. 여러가지 스타트업 방법론에 대해 스터디도 하고 실천도 하면서 효능감도 많이 느꼈고, 개발 역량도 많이 올라왔어요. 백엔드, 프론트엔드, 운영 모두요.
그런데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대표가 된다는 건 엄청난 책임감과 압박감이 생기는 것이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해서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 창업지원 과제에 신청하기 위해 서류를 하루종일 작성한다거나, 붙어서 기뻐했는데 그걸로 인건비는 줄 수 없었다거나, 컴퓨터를 샀더니 감사용 보고서를 또 작성해야 한다거나… 취지는 이해하지만 굉장히 괴로웠어요. 이건 요즘도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이후에 ‘내가 다시 창업을 하더라도 대표는 절대 안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또 이후 합류하는 스타트업들의 대표님들을 존경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창업을 그만두고 뭘 할지 잠깐 고민하던 차에, 고등학교 동기이자 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가 게임 하나 만들지 않겠냐고 꼬셨습니다. 취업을 하면 도전하기 어려운 경험이라고 생각해, 다른 개발자 친구 하나 더 꼬셔서 셋이서 도전했고요. 이것도 창업처럼 굉장히 고통스러우면서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저희가 만든 건 우주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오래 살아남는 게 목표인 모바일 아케이드 리듬액션 게임이었습니다. 이름은 ‘스매시 토이즈’ 였고요. 지금은 약관 업데이트를 안 해서 스토어에서 내려갔지만 앱스토어랑 플레이스토어에도 올렸었어요.
스토리텔링이 뭘까. 재미란 뭘까. 어떻게 해야 사용자가 과금을 할까. 같이 원초적인 고민도 많이 하고, 다국어 번역하는 경험도 해보고, 게임 내의 광고와 게임 홍보 광고 활동도 해보고, 버그가 있는 버전을 배포한 뒤에 핫픽스가 승인되어 재배포되기를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던 경험도 있었죠.
이 때 하루에 16시간씩 일했는데 협업 방법론, 프로세스, 테스트, 아키텍처 설계 이런거 하나도 없이 그냥 맨땅 헤딩 노가다로 개발했어요. 나중에 버그픽스하고 QA할 때 진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손가락 관절에 염증도 왔었고요.
출시는 했는데 게임이 별다른 성공을 하진 못했어요. 재밌게도 출시 전까지는 그렇게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출시 후 결과가 별로 안 좋으니까 그게 누구 탓이냐 싸우기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이후 잘 봉합은 됐지만요.
어찌됐든 우리가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었다는 경험 자체는 오랫동안 강력한 자신감으로 남았습니다.
연구실, 창업, 게임개발을 거쳐 드디어 남들이 많이 하는 대로 회사에 들어간 게 2016년, 30살 때였습니다.
캐시슬라이드라고, 잠금화면에서 슬라이드해서 돈버는 앱으로 유명했던 엔비티라는 회사에 서버 개발자로 입사했는데요. 엔비티는 몇 년 전에 코스닥 상장도 했고, 요즘은 토스나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웹툰처럼 사용자의 행위 기반으로 포인트 주는 광고 시스템(애디슨)으로 꽤 매출이 괜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2016년까지만 해도 개발자에 대한 처우가 딱히 좋진 않았어요. 2010년에 LG전자 인턴했을 때 월급이 세전 200만원이었는데, 여기는 저의 대학원 석사 학위를 인정해줬음에도 세전으로 월 300만원 언저리를 받았거든요.
근데 이때는 이 돈이 큰 건지 작은 건지에 대한 판단도 딱히 없었고, 돈이 주 관심사도 아니었습니다. 광고 도메인에도 솔직히 큰 관심은 없었고요.
단지 여기에 제가 신뢰하는 멘토를 비롯해 AC2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재밌게 일하면서 성장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리고 여기 CTO가 제 대학원 동기이기도 했는데, 이 친구와 멘토님이 강력하게 추천해줘서, 면접 점수가 엉망이었는데도 통과했어요. 뭔 자신감이었는지 면접 준비 거의 안 했거든요. 완전히 인맥빨이었죠.
결과적으로는 10개월밖에 안다니긴 했는데 짧은 기간동안 압축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배웠어요. 이때 당시 개발자만 30명이 넘고 전체 인원은 100명 가까이 되는 큰 회사였기 때문에 프로세스와 협업, 조직문화에 대해서 배운 게 많습니다. 나중에 여기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써먹은 적도 많고요.
이 사진은 제가 정규직 전환 프로젝트로 수행했던 건데 서버 코드의 주요 병목을 개선해서, 피크 타임 기준 응답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던, 아주 기뻤던 순간입니다. 저에게 낮은 면접 점수를 주셨던 분들이 이 프로젝트 전후로 절 높이 평가하시게 됐었던 것도 뿌듯했어요.
엔비티에서 인정도 받고 있었고 큰 불만은 없었는데, 또다른 대학원 동기 형이 절 꼬셨어요.
창업은 그만뒀어도, 저는 계속해서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주요한 수단 중 하나가 교육이라고 봤고요.
그런데 코딩교육으로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비전이 있는 이 엘리스라는 회사가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형하고 얘기한지 사흘도 안 돼서 아주 충동적으로 이직 결정을 했어요. 이 때 엘리스 총 인원이 한자릿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형이 아무리 대표라고 한들, 나의 뭘 믿고 면접도 없이 날 데려간건지, 저는 또 무슨 깡으로 그렇게 작은 회사로 자신만만하게 이직한건지 모르겠네요. 참 무모했죠.
여기서도 원래는 백엔드 개발을 하려고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엘리스에 프론트엔드 맡을 사람이 더 부족해서 갑자기 프론트엔드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여기가 제가 처음으로 React라는 모던한 프론트엔드 기술 스택을 최초로 배운 곳이었죠.
주요 사건 및 의사결정
- 창업, 그리고 그만둠
- 게임개발, 그리고 그만둠
- 취업, 그리고 이직
- 친구들과 2년간 스터디
- 즉흥연기 시작
의사결정 요인 및 계기
- 사람, 사람, 사람
- 돈보다는 비전, 성장, 재미
이 시기에는 온전히 저만의 의지로 선택한 게 많지 않았어요. 다 친구나 지인이 꼬셨고, 선택의 가짓수도 넓게 가져가지 않았어요. 어찌보면 팔랑귀 시기였다고 볼 수 있죠. 엔비티 다니던 시절, AC2 멘토였던 분이 연 즉흥연기 수업에도 즉흥적으로 참여했었고요.
제안한 사람이 마음에 들었고, 재미있어 보였고. 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런 점들이 선택의 요인이었죠.
그런데 이렇게 성급하게 선택했지만 후회한 결정은 하나도 없었어요. 실제로 엄청 재밌게 일하고 엄청 성장했거든요. 사실 이 때는 제가 어딜 가든 충분히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기도 했고요.
다만 신경이 쓰였던 건 내가 너무 짧은 주기로, 흥미본위로만 조직을 옮겨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였는데 다행히 이걸 자각하면서 점점 주기가 길어지긴 했어요. 게임개발 6개월, 첫직장 10개월, 두번째는 2년 반, 세번째는 3년 반 이런 식으로요.
이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준 것들
- 이전 조직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음
- 개발 스터디, 스타트업 스터디
- 광고가 돌아가는 구조에 대한 이해
- React를 배움
커리어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것들
- 출시된 게임 자체
- 이때부터는 거의 모든 경험이 의미있게 느껴짐
그래도 조직을 옮기면서 다행이었던 건, 제가 개판치면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조직 내에서 적을 잘 만들지 않는 성격이었거든요. 사실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수도 있는데 제가 정치도 잘 모르고, 가십도 신경 안쓰고, 안테나가 약한 편이라서 몰랐을 수도 있어요.
근데 이게 참 좋았던 게, 직장이라는 게 결국 좋은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고 스타트업 씬도 무척 좁은데 거기서 평판이 안 좋아지면 큰 손해잖아요. 그래서 가장 최근에 이직하기 전에는 좀 더 의도적으로 훌륭한 마무리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커리어에 영향을 안 받은 걸 찾기가 좀 어렵네요. 하나 써놓은 게임도, 게임을 만들었던 경험은 제 안에 크게 남았거든요. 친구들과 개발 스터디한 게 첫 직장에서 서버 개발자로서의 저를 지탱해줬고, 스타트업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스터디는 제 스타트업 개발자로서의 삶 전체에 좋은 영향을 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엔비티에서 광고 도메인을 그리 선호하진 않았지만, 결국 무료 앱이 돈 벌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광고와 중개였고, 그 중 하나의 큰 축에 대한 도메인 경험과 지식을 쌓은 건 이후에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React는 제가 이걸 기반으로 프론트엔드 리드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모르긴 했던 것 같아요. 어떤 기술이 부상할지 누가 알겠어요. 그냥 운이었죠.
챕터 5: 결혼, 투병, 이직, 출산, 이직(~2023)
엘리스에 있는 동안 결혼을 했어요.
결혼 준비 과정이 저에게 엄청나게 스트레스였는데요. 아내와 결혼 전 7년 사귀면서 거의 한 번도 안 싸웠는데 결혼 준비하면서 양가 부모님과의 갈등 중재하랴 뭐 하랴 하면서 갑자기 엄청 많이 싸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빠지나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병에 걸렸었더라고요.
결혼하고 반년도 안돼서, 신혼 때 진단을 받았어요. 갑상선 항진증이라고, 갑상선 호르몬이 필요한 이상으로 계속 나와서 몸의 신진대사가 엄청 빨라지고, 항상 땀나고 피곤하고 살빠지고, 온몸이 가렵고 이런 병입니다.
사람마다 증상과 부작용이 다르지만 저는 어느날 밤에 갑자기 다리가 안 움직인 적도 있었고요(저칼륨혈증). 낮은 확률로 나타난다던데 약이 저와 안 맞아서, 간 대사에 이상이 생겨서 황달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눈이 완전 노래서 무슨 골룸 같았어요. 거울 쳐다보기도 싫었고, 맨날 긁느라 밤에 잠도 못 자고요. 결국 휴직하고, 방사성 요오드를 주입해 갑상선을 파괴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갑상선암 치료 방법과 비슷해요.
이 시기에 제가 뭘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뭘 먹긴 했는지 이런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굉장히 절망적인 시기였고요. 심지어 저 간호하다가 아내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울증이 왔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 시기를 블랙홀이라고 불러요. 암흑기라는 의미도 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난다는 의미도 있고.
이렇게 투병을 하고 나니까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특히 가족과 건강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엄청 강해졌죠. 예전에는 거의 하루도 안 빼놓고 야근을 했거든요. 이 이후로는 확실하게 야근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결혼도 했는데 휴직해서 돈 못 버는 사람이 되니까 진짜 우울하고 나약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성장도 좋지만 돈도 놓칠 수 없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결국 복직은 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직을 했어요. 엘리스도 초기 스타트업이었고 월급이 높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엘리스가 기업용 코딩교육 업계에서 잘 나가는 편이지만 그 때는 진짜 힘든 시기였어요.
아무튼 이번에는 훨씬 더 신중하게 움직였어요. 한 곳만 지원하지 않았고, 제가 오퍼 온 것을 무기로 다른 곳과 협상도 해봤고요. 그 결과 KCD(한국신용데이터)라는 좋은 회사에 기존 대비 훨씬 높은 연봉으로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KCD에는 영재학교 동기가 저 빼고 3명 있었습니다. 여기는 인맥만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그게 제가 적응하고 영향력을 펼치는 데는 도움을 줬어요.
저의 프론트엔드 개발자, 프론트엔드 팀 리드 라는 정체성은, 그리고 그에 걸맞는 역량은 모두 여기서 갖추게 됐습니다. 정말 훌륭한 동료들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실제로 이 회사에 계시던 분들 중 많은 분을 제가 지금 다니는 XL8로 모셔왔고요.
그리고 KCD 재직 중에 아이를 낳았어요. 제 딸이 2019년 11월생인데, 2020년 초에 코로나가 터졌죠. 코로나로 아주 많은 분들이 고통을 겪었고, 어떤 면에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지만 저는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에 많은 혜택을 받았어요.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길었거든요.
원래는 결혼이 인생 페이즈 2 인줄 알았는데 육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아예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투병하던 때보다도 훨씬 더 가족 중심 사고를 하게 되고, 삶의 질을 만들어주는 여러 수단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돈의 가치도 저에게 더 커졌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블랙홀 이후 상당히 흐려져 있던 삶의 목표가 육아하면서 다시 되살아났어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미래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건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을 동반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 세상이 이렇게 될 것 같고, 거기서 나는 이러한 역할을 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돈을 벌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그런 고민을 하며 삶의 목표에 대해 글을 썼는데, 이 때 ‘내가 미래를 바꿀 변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구나’ 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변화시키는 변수에 내가 가까이 가야겠다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했어요.
그 중에서도 AI가 가장 미래 변화의 핵심이자, 제가 이미 가진 자원을 활용하기에 좋은 분야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후보를 찾아다녔죠. 인터뷰어로서 질문 템플릿도 준비해서 여러 회사의 지인들을 수소문했습니다. 그중 몇 군데를 골라서 실제 면접을 봤고요.
그렇게 선택해서 1년 반 전에 이직한 곳이 지금의 직장입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곳이었거든요.
- 머신을 학습시키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직접 가지고 있거나, 가져올 수단이 있다.
- AI 기반 프로덕을 주력으로 내세우고 있어서, 프로덕 개발에 참여하기만 해도 이쪽 생태계의 트렌드를 알 수 있으며, 이 도메인 기술을 전혀 모르는 나 같은 개발자에게라도 AI 학습과 역량 향상의 기회가 열려있다.
- 나의 현재 스킬셋(웹 프론트엔드 프로덕 엔지니어링, 엔지니어 코칭/매니징)을 이 회사가 필요로 한다. 적어도 내 높아진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주고, 그에 대한 반응을 내가 직접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프로덕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프로덕의 성장 포텐셜이 커서, 내 기여분도 꽤 클 수 있는 시장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ChatGPT가 이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요. 운이 좋았죠.
사실 지금 직장, 그리고 이 마지막 시기에 대해서도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대부분은 제 블로그에 써두기도 했고, 또 너무 가까운 과거는 판단에 편향이 들어갈 수 있으니 안 하고 싶네요. 시간도 다 됐고요.
맺으며
커리어 변곡점에서 결정적 영향을 준 것들
- 좋은 커뮤니티, 좋은 사람들, 좋은 관계
- (특히 커리어 초기에) 다양하고 새로운 도전에 응하기
- 삶의 목표에 따라 행동하기
- 성취보다는 성장에 집중하기
- 생각과 경험을 꾸준히 글로 정리하고 알리기
행복한 삶에 꾸준히 영향을 준 것들
- 좋은 커뮤니티, 좋은 사람들, 좋은 관계
- 다양성을 기반으로 어떤 사안이든 긍정 해석할 수 있는 멘탈
- 개인과 사회, 몸과 뇌가 섞인 꾸준한 취미생활
-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효과적으로 건강 챙기기
-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양과 질을 모두 늘리기
제 커리어에 있었던 수많은 변곡점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무엇보다도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커뮤니티에 속해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여기서 커뮤니티는 물론 직장도 포함이고요.
특히 커리어 초기에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기회를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을 경험하는 도전에 거리낌없이 응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도전에 더 끌렸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다양성이 저를 인격과 역량을 모두 성숙하게 하고, 이후 여러가지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세워놓고, 때때로 돌이켜보며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게 저의 자존감을 높이면서도 좀 더 정렬된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됐고요. 목표가 있는 사람은 매력적이기 때문에, 제가 비교적 쉽게 원하는 곳에 이직하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아내도 제가 목표 얘기할 때 눈이 반짝반짝해져서 좋았다고 했었고요.
특정 시기에 좋은 성취를 거두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매몰되지 말고, 좀 더 큰 그림에서 그 경험을 통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더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과 경험을 블로그에, SNS에, 뉴스레터에 정리하고 알리는 건 저 자신의 성장에도 좋았지만 저를 브랜딩하는 데도 굉장히 효과적이었어요.
그런데 좋은 커리어를 쌓는 건 결국 행복한 삶을 살려는 거잖아요?
좋은 커뮤니티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건 여기서도 무척 중요했어요. 이런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고, 인정받으면 자존감이 엄청나게 차오르죠.
그리고 운이 참 좋았다는 말을 오늘도 많이 했는데 어쩌면 제 운은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무엇이든 긍정 해석하는 태도가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혼자 몰입하면서 해소되는 스트레스가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해소되는 스트레스가 있죠. 둘이 주는 게 좀 다른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글쓰기, 보드게임, 즉흥연기라는, 개인활동과 사회활동, 몸과 뇌가 섞인 취미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일이 바쁘고 육아가 바쁘다는 이유로 이 취미들을 하나도 못했던 시기에는 정말 괴롭더라고요. 일과 가정에 오히려 소홀해지고요.
30대 넘어가니까 진짜 말 그대로 몸 여기저기가 고장나서 삐걱거려요.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많으니 시간은 부족하죠. 그래서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효과적으로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을 챙기는 게 제게 아주 잘 맞는 방식이었습니다. 스탠포드에서 신경과학을 가르치는 Huberman 교수의 유튜브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근 제 일상을 가장 크게 바꾼 유튜버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이든 제 아내와 딸아이든, 제 남은 삶에서 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냉정히 계산해보면 그리 길지 않더라고요.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모두 더해도 365일이 안 될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래서 요즘은 가족과 함께할 때 최대한 집중하고, 그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제게 행복의 정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더군요.
저는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기대했던 대로, 저의 지난 20년을 간략하게나마 돌아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발표가 '내 커리어와 삶에도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되는 데 영향을 주었기를 기대하며 발표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