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년계획 역사
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년 목표 같은 걸 거의 세우지 않았다. 1년을 돌아보는 회고(기년회)는 자주 했었지만 새해 다짐은 썩 내키지 않더라. 목표를 세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터무니없이 달성하지 못한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상황이 너무 많이 변했다’며 애써 변명해도 기분은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점점,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느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언행일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안 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은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1년 회고도 잘 안 했다. 눈앞에 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잘만 갔다.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샌가 회사에서도 역량을 크게 인정받고 있었던 터라, 그냥 이렇게만 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생각은 2021년 가을, 만 34세가 되는 생일날 인생 계획을 다시 세우면서부터 급격히 달라졌다. 10년 전에 대학 동아리 시절 그렸던 ‘30년 계획’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새로운 인생 계획을 진지하게 그렸다. 안주해있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이 생겼고, 블로그를 되살렸으며, 인공지능 업계로 이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신중한 탐색 끝에 지금의 직장 XL8로 옮겼다.
김창준님의 AC2 커뮤니티에서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내가 AC2 교육을 들었던 2013년부터 꽤 오랫동안 메일링 리스트가 주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는데, 육아하고 회사 일만 하는 사이에 디스코드로 주 활동처가 바뀌었더라. AC2 디스코드 서버에 들어가 오랜만에 커뮤니티에 참여하면서, 성장욕구가 넘쳐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것저것 배우고 실천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언제 떠났냐는듯 커뮤니티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그러다가 2021년 말 AC2에서 홍영기님으로부터 OKR을 배웠다. 나의 거시적 인생 목표를 한 조각씩 이뤄가는 데 OKR을 써보면 좋겠다 싶었고 야심차게 1년 계획을 짰다. 그런데 2022년을 회고해보니 상반기에는 열심히 계획대로 살았으나 하반기에는 거의 OKR을 신경쓰지 못했더라.
그래도 OKR 자체는 마음에 드는 프레임워크여서, 2023년에도 OKR을 이용해 1년 목표를 설계했다. OKR만 정하는 게 아니라 Key Results를 성취하기 위한 행동계획도 함께 짰다. 목표 중 하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운동하고, 육체건강과 정신건강을 증진시킨다.” 였고, 2022년에 영접한 Huberman의 4가지 건강 습관(햇빛, 유산소운동, 근육운동, 간헐적 단식) + alpha 를 실천하는 걸 행동계획으로 삼았다. 자연스럽게 주 단위로 실천 기록을 남기는 구글 스프레드시트도 만들었다.
- 매일 아침 기상 후 햇빛 15분 쬐기
- 매일 23시 이후 빛 안 쬐기
- 주당 3-4회, 근육 그룹당 5-10세트 근력운동
- 주당 150~180분 Zone2 유산소운동
- 하루에 12시간 이상 공복상태 유지
- 가족(아내, 여은이, 부모님)에게 고마운 일 이야기하기
2023년 상반기가 지나고 회고를 했다. 어김없이 상황이 연초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습관 기록 시트에 힘입어 목표 대부분을 만족스럽게 달성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 방심하지 않고, 2022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하반기 목표를 다시 잡았다. 습관의 강력함을 깨달았으니 습관 기록 시트 또한 재설계했다. 이 습관 시트는 2023년 내내 나와 함께하며 기분좋은 한 해를 보내는 1등공신이 되었다.
2023년을 떠나보내며 하반기를 회고하고 나니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뭔가 다르다
새해 다짐을 내켜하지 않던 것도 어느새 옛말이다. 이제는 오히려 새해에 목표를 잡지 않으면 초조해진다. 당장 올해 상반기 목표를 잡아 블로그에 올리고 싶었지만, 작년 회고글을 쓰느라 이미 해가 넘어가버린 상황. 작년부터 쭉 이어오던 기록 습관은 꼭 이어가야겠는데… 그렇다고 작년과 똑같이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예전같았으면 이 둘 중 하나를 했을 것이다.
- 포기하고 일단 계획 제대로 세울 때까지 작년 그대로 실천한다
- 기존 스케줄을 조정해서라도 억지로 시간을 내서 어떻게든 계획을 짜고 나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러모로 다르게 해봤다. 지난 2년간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고, 회고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 작년에는 나 혼자서 글을 다 완성하고 나서 공개했다. 올해는 계획 실천에 사회적 압력(AC2)을 적극 활용해야겠다. 계획해나가는 과정 자체도 공유해보자. 생각나는 거 그냥 다 올려 그냥.
- 계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내 가장 큰 무기는 매일 기록하는 습관 시트다. 내 목표와 정렬된 습관을 설계하고, 기록하고, 실천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다 보면 목표가 어느새 가까워져있을 것이다.
- 습관 시트를 일찍부터 공유하려면 처음부터 템플릿을 다 만들어두지 않는 게 더 유리하다. 하긴, 작년에도 진행하면서 템플릿 계속 바꾸는 게 꽤 귀찮았다. 며칠치만 만들어두고 해보면서 업데이트하자. 가장 중요한 것부터, 작은 걸음으로 한 발씩, 생성적으로.
- 내가 어디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가 곧 나를 규정한다. 단순히 시간의 양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 집중하는 시간을 어디에 쓸지를 통제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충분히 깨어있어야(mindful) 한다. 습관 시트를 내가 매일매일 깨어있게 해주는 장치로 써먹자.
- 하지만 작년 회고에서, 내가 실제로는 깨어있지 않은(mindless) 상태에서 습관 기록을 한 게 많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것들은 내 삶의 변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지속성도 떨어졌다. 가끔 기록을 건너뛴 날은 나중에 기억을 되살리며 기록했는데 이 때도 엄청 대충 적게 되더라. 그러니 내가 왜 기록을 하는지 기억할 수 있으면서도, 기록 자체가 더 쉽게 되도록 장치와 환경을 바꾸자.
- 계획 실천 과정에서 목표를 돌아보고 조정하는 건 필수다. 작년에 목표를 반기 단위로 쪼갠 건 아주 잘했으니 이번에도 그대로 해보자. 더 나아가 월 단위로 목표를 돌아보고 재조정하는 걸 잊지 않도록 습관 시트 안에 장치를 만들어두자.
전체 계획을 짜지 않은 채 가볍게 일일 습관만 설계하고, 하루하루 실천하고, 과정을 다 공개하면서 빠르게 사이클을 돌리니 개선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작년에는 습관 기록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정리해보니, 이 때는 기록 방식의 변화 주기가 가장 짧을 때에도 1개월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올해는 이 첫 일주일간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기록 방식을 업데이트했다. 횟수로 따지면 크고작은 거 포함해서 수십번 개선되었다. 시작을 조그맣게 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체계를 만들어둔 덕에 개선에 부담도 없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변화다.
2024년 상반기 키워드
작년에는 하나하나 목표를 상세하게 정했었는데(여러 층위의 목표, 행동계획, 프리모르템 등) 이번에는 습관 설계 시트를 통해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서 자연스럽게 목표에 접근하도록 설계했다. 그래서 목표를 너무 자세하게는 적을 필요 없다고 봐서, 키워드별로 어떤 걸 생각하는지만 적어두었다.
만약 한두 달 뒤 목표를 리뷰할 때 진척도가 예상보다 크게 낮다면 이 의사결정을 재고해볼 수 있다. 그럼 그 때 더 설계를 해야지.
키워드: 직무 생산성
- 회사에서 개발자들의 무덤처럼 여겨지는 레거시 자막 에디터에 드디어 내가 들어왔다. 사내에서 관리자로서의 역량보다는 개발자로서의 역량을 훨씬 더 크게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정된 시간에 큰 임팩트를 제대로 내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끌어올리고 싶다. GPTs를 적극 활용하는 건 물론이다.
- 내가 에디터를 메인으로 맡았으니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복잡한 시스템 아키텍처를 시각화하고, E2E 테스트 되살리고, 불필요한 복잡함을 걷어내면서 유지보수하기 더 좋은 구조로 바꿀 것이다. 에러 탐색하고 디버깅할때마다 다음 디버깅이 더 쉬워지는 구조로 만들고, 이 모든 과정을 시각화해서 기록하고. 잘만 쌓아둔다면 이 주제로 나중에 강의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를 통해 현재 떨어져있는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에디터 때문에 제품 못써먹겠다” 가 아니라 ”에디터 때문에라도 제품을 써야겠다“ 는 얘기가 나오도록 반전시킬 것이다. 새 기능을 더 추가하기보다는 기존 기능을 쓸만하게 만드는 쪽으로 우선 집중한다.
키워드: 육체적 건강
- 작년에는 정신적 에너지까지 포함하여 ‘활력’이 키워드였지만, 정신적인 건 내가 어떻게든 잘 회복/유지하는 것 같다. 반면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지고, 운동 자주 못 하는 걸 어떻게든 고치고 싶어서 키워드를 육체 쪽으로 잡았다.
- 작년에 자세 교정 및 체력을 위해 아주 비싼 PT를 끊었다. 작년 결제분이 완료되면 PT는 더 안하겠지만(PT 자체는 아주 좋은데 거리가 편도 1시간으로 너무 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운 게 유의미하게 누적되도록 해야 한다. 체력을 안 키우는데 신생아는 어떻게 키우겠는가.
- 그러려면 우선 PT에서 내준 과제를 내가 매일 더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이걸 위한 장치를 마련하자. 사회적 압박을 포함하여. 그리고 원래 매주 가던 걸 주기를 좀 늘려서 더 오래 효과가 지속되게 해보자.
- PT 과제 열심히 안 하던 시기부터, 내가 여기저기 부딛히는(발가락, 무릎, 팔꿈치 등) 횟수가 다시 늘어난 걸로 느껴진다. 너무 뇌로 생각을 많이 하는 건지, 육체에 대한 인지가 부족한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게 큰 부상으로 이어지면 막심한 손해다. 매일 운동하면서, 이런 부딛힘도 줄어드는지 기록해보자.
키워드: 얼차려
- 얼차린(mindful) 상태는 얼빠진(mindless) 상태의 반대말이다. 작년 독서노트 작성하면서 얼빠지게 읽은 책이 너무 많았다는 걸 느꼈다. 인상깊게 읽은 책에서는 최소 행동 하나를 뽑아내서 실천했어야만 얼빠지지 않은 것이다.
- 올해는 내가 하루하루 얼마나 깨어있고 집중했는지 그 자체를 습관으로 기록해보자. 이것만 유지해도 내가 뭘 하든 성과가 훨씬 커질 것이다. Rize 앱, AC2에서 배운 작업 등대 등 도구들을 적극 활용해보자.
- 인지적 프롬프팅과 GPTs도 얼차림의 조력자, 또는 얼차림의 결과로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여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보자. 얼차림, GPTs, 여러 도구들을 통해 직무 생산성도 가파르게 오를 거라고 기대한다.
키워드: 브랜딩 & 수익화
- 작년에는 1:1 멘토링이나 코칭도 많았지만 점차 줄여나갔고, 갈수록 1:n이 더 많아졌다. 모교 발표, 인프콘 발표, 안상완님과 함께한 ‘인지적 시각화’ 오프라인 강의. 올해는 여기서 더 확장해서 온라인 강의에 입문해본다. 상완님과 함께 조금씩 촬영하고 있는 인지적 시각화 강의는 진행속도가 느린 게 문제지 내용에는 대단히 만족한다. 그동안 배운 효과적 교육 및 효과적 학습에 대한 이론도 적용하고 있어서, 상완님과 함께하는 회의는 회의 자체로 신난다.
- 상반기 중에 블로그 전체를 Ghost로 이전할 생각도 있다. 원래는 내 글 중 일부를 영어로 옮겨서 substack이나 medium에 올리는 정도만 생각했는데 Ghost 소개글을 보니 아주 괜찮아 보인다. 글을 자주 업데이트하는 내 성격상, 노션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super.so를 계속 써왔지만… 구독료도 싸지 않은데 SEO가 잘 안 된다는 단점이 너무 치명적이다.
- Ghost로 만든 블로그에 영어로도 올리고, 삶의 밀도를 높이는 여정 뉴스레터도 maily에서 여기로 통합하고, 블로그 자체에 구독 버튼도 넣고, 프리미엄 멤버십도 넣는 등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졌다. Notion to Ghost integration이 얼마나 잘 되느냐가 관건인데, 뭐 천천히 해보면 되겠지. 이 과정 자체도 블로그 글감이다.
2024년 상반기 습관 기록
구글 스프레드시트 하나로만 기록했던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기록을 돕는 도구가 여럿이 되었다.
- 우선 얼차린 상태에서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일간/주간/월간 기록을 위한 노션 템플릿을 만들었다. 내가 각 항목을 왜 기록하는지도 자세히 설계하고, 더 심도있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일일 템플릿은 습관 기록용, 주간 및 월간 템플릿은 회고용이다.
- 그런데 노션 템플릿을 길게 만드니까 모바일에서 적기가 어렵더라. 순간순간을 더 잘 기록하고 싶었는데, 아이폰에서 노션을 그대로 쓰자니 너무 느리고 무거웠다. 예전에는 기본 메모 앱도 좀 썼었는데 포맷팅이 구렸다. 마침 Ghost를 알게 된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새로운 메모 앱 Drafts도 알게 되어 써봤는데 반응속도가 엄청 빠르고 만족스러웠다. 모바일에는 Drafts에 기록하고, PC에서 노션에 옮기는 패턴이 생겼다.
- AC2 커뮤니티를 통해 아이폰의 정신건강 검사 기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매일 2번씩 기록하게 해놨더니 무척 만족스럽다. 여러가지 감정 단어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좋고, 애플워치로도 기록할 수 있어 편리하다.
- ‘신체 말단 부딛힘 기록’은 어떻게 해야 나중에 인사이트가 생길지 고민을 좀 했는데, 이것 또한 AC2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구글 폼을 만들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부상 정도는 어땠는가(
Near Miss
부터뼈 부러짐
사이 10점 스케일)를 남긴다. 아이폰 바탕화면에 크롬 URL 바로가기로 만들어둬서 즉시 입력 가능하다. - 마지막으로 스프레드시트는 계산이 쉽다는 점을 이용하여 숫자 위주로만 간단히 적고, 나중에 통계 낼 때 사용한다.
AC2 커뮤니티와 함께 한 단계씩 만들고, 해보고, 개선하는 사이클을 거쳤기 때문에 이정도 수준까지 수월하게 개선할 수 있었다.
아래는 지난 일주일간의 조정을 거쳐 만들어진 노션 템플릿이다.
일일 습관 기록
일일 템플릿은 일어나서 하는 일들 순서대로 기록하도록 한다. 어떻게 하면 나의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울까를 깊이 고민한 결과다. 템플릿이 바뀌어도 부담 없도록 1개월 단위로 페이지를 만들어뒀으니 템플릿을 수시로 업데이트한다. 나중에 한꺼번에 보기 쉽도록 ‘접기’를 적극 활용한다.
일일 스프레드시트
데이터 좀 쌓이면 습관 달성도와 전반적 만족도, 주간회고에서의 느낌 사이의 상관관계를 관찰해보려고 한다.
주간 회고 + 월간 회고
회고는 일일 습관 기록을 옆에 띄워두고 볼 것 같아서 아예 별도 노션 페이지로 뺐다. 주간회고와 월간회고는 같이 있어도 될 거라고 느꼈다.
주간회고는 한 번 해보니까 감이 와서 템플릿의 완성도가 꽤 높은데, 월간회고는 아직 안해봐서 모르겠다. 여기서 엄청 바뀔 수도 있다. 어쨌든 주간회고와 월간회고를 상반기 목표 달성의 key가 되도록 설계하는 게 핵심이다.
맺으며
비록 지금 당장은 목감기에 걸렸지만… (신생아 육아를 포함하여)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새해를 살아가고 있다. 올 상반기도 욕심을 무척 많이 냈다. 지금의 이 습관들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가 성취의 핵심이리라.
다음달에 이 글을 다시 봤을 때 부끄럽지 않길 바란다.